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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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의 군함 양무호 구매는 국방비리, 국제 사기 사건이었다. 미쓰이 물산이 구입한 25만엔보다 두 배나 비싼 55만엔(지금 시세로 약 440억원)에 구입했는데 이는 국가 예산의 10.2%, 군부 예산의 26.7%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런데 너무 어이없는 일은 해군 사졸 1명도 없이 군함부터 샀다는 사실이다. 그 단서가 1903년 7월 29일의 ‘고종실록’에 나온다.

이날 군부대신 윤웅렬이 사직 상소를 했다. 윤치호의 부친인 윤웅렬은 7월 17일에 임명된 지 12일 만에 사직 상소를 낸 것이다.

그런데 군부대신은 너무 자주 바뀌었다. 1903년 1월 25일에 군함 도입 계약을 한 신기선은 1월 31일에 교체되고, 심상훈이 군부대신 서리로 임명됐다. 5월 9일에는 이근택이, 5월 13일에는 이봉의가 군부대신이 됐고, 6월 2일엔 윤웅렬이 군부대신 서리를 하다가 7월 17일에 대신으로 임명됐다.

그러면 사직 상소를 읽어보자.

“(전략) 군함을 구매할 처음에 신이 비록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므로 널리 논의했어야 하는데, 의정부에서 충분히 논의하게 하지 않고 군부에서만 계약을 맺게 해 이것이 잘못돼 의견이 분분히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생각건대, 겨우 한 척의 군함을 구입하자 비용부터 걱정하니, 이 점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셔서 신의 상소를 의정부에 속히 내리셔서 회의(會議)하고 품처(稟處)하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고종은 비답했다.

“제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사직하는가? 말미(末尾)에 진술한 것은 의정부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해 품처하게 하겠다.”

8월 7일에 의정부 참정(총리) 김규홍이 해군 설치는 타당하지 않고, 구입한 군함 문제는 군부에서 따로 조치하도록 아뢰었다. (고종실록 1903년 8월 7일)

“신이 여러 신하들과 충분히 토의해 보니 모두들 이미 양성해 놓은 사졸(士卒)들이 없고 또 경비(經費)도 이처럼 구차한데 해군을 설치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치 않다고들 말했습니다. 군함을 접수하는 일은 군물(軍物)과 관계되니 군부로 하여금 따로 방략을 세워 조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했다.

9월 12일에 군부대신 윤웅렬이 아뢰었다.

“이미 군함이 있으니 비용이 적지 않아 사실 방도가 없습니다. 전(前) 해방영, 통제영, 각 수영(水營)에서 관할하는 군사 둔전 토지의 영업세와 해세(海稅), 선세(船稅), 또 해면(海面)의 어선세(御膳稅)를 거두어들여 모두 해당 군함 경비로 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고종이 윤허했다.

해군도 없이 군함부터 샀고, 군함 운영경비를 또 세금으로 충당했으니 대한제국은 정말 한심하다. 이러고도 ‘근대화를 향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부패하고 무능하다.

나중에 양무호는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해군에게 접수돼 화물선으로 전용됐다. 1907년 군대해산 후엔 해양 실습선으로 전락했다가 1909년에 일본 하라다 상회에 4만 2천엔에 팔렸다. 55만엔에 사서 10분의 1도 못 받았으니 완전 고철값이었다. 결국 양무호는 1916년에 동중국해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나라의 힘을 키운다’고 고종 황제가 직접 이름 지은 ‘양무호(揚武號)’는 결국 ‘국제사기 사건에 휘말린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란 오명(汚名)만 남겼다. 이게 ‘광무개혁’의 민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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