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 거사가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대동단(大同團)에 대한 검거 선풍이 휘몰아쳤으며, 그 결과 단장 전협(全協)을 비롯하여 최익환(崔益煥), 한기동(韓基東), 송세호(宋世浩), 최성호(崔成鎬) 등 3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선고를 받았는데, 전협(全協)이 징역 8년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하여 최익환(崔益煥) 징역 6년, 정남용(鄭南用) 징역 5년, 이건호(李建鎬), 윤용주(尹龍周), 동창율(董昌律), 송세호(宋世浩), 한기동(韓基東), 이신애(李信愛), 윤종석(尹鍾奭), 유경근(劉景根) 등이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며, 양정(楊楨), 권헌복(權憲復), 박형남(朴馨南), 이을규(李乙奎), 정규식(鄭奎植) 등이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권태석(權泰錫), 민강(閔橿), 안교일(安敎一), 정희종(鄭喜鍾), 박원식(朴源植) 등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또한 장현식(張鉉軾), 이정(李政), 박정선(朴貞善), 김상열(金商說), 전필순(全弼淳), 조종환(趙鍾桓) 등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김익하(金益夏), 이종춘(李鍾春), 전대진(全大振), 이능우(李能雨) 등이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았으며, 박용주(朴龍柱), 김영철(金永喆), 김종진(金鍾振) 등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의친왕의 상해망명 거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당시 독립운동의 양상은 새로운 판도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 붕어(崩御)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던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을 황족대표(皇族代表)로 파견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었을 것으로 본다.

이와 더불어 본 거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상해임정 요인 강태동(姜泰東)이 중심이 되어 이왕직(李王職) 전의(典醫) 안상호(安商浩)와 의친왕의 간호사(看護師) 최효신(崔孝信)을 상해로 불러내어 미국으로 보내서 고종황제의 독살을 폭로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실제 이루어 졌다면 독립운동에 미치는 그 파급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야심찬 계획이 결국 거사 실패로 중단되게 되었으니 어느덧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라볼 때 당시의 상황에 아쉬운 심정 금할 수 없다.

한편 1921년에 발생한 대한민족 대표단 연명부 청원사건은 1921년 8월에 조직한 대한민족 대표단에서 건의서와 연명부를 작성하여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던 5대 열강회의에 제출하였던 것인데, 당시 갑신정변(甲申政變) 주역의 한명이었던 서재필(徐載弼)이 뉴욕에 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국내에서는 이상재(李商在)가 연락을 맡아 13도와 260여개군 기타 각 사회단체 대표자 372명이 서명하였다.

구체적으로 이 열강회의가 전후의 군비축소와 태평양 문제 그리고 원동정책을 확정했던 것이었으므로 한국문제 조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열강회의에 건의서의 내용이 반영되지는 못하였지만 독립의지에 대한 대외적인 선전효과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의친왕이 당시 황족대표로서 서명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상해망명 거사가 실패로 끝난 이후 사동궁(寺洞宮)에서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던 의친왕의 항일의지(抗日意志)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