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비(義親王妃)는 1906(광무 10)년 엄귀비(嚴貴妃)가 조직한 귀족부인회(貴族夫人會)의 부총재(副總裁)로 활동하였으며, 이듬해인 1907(융희 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강제퇴위당하고 순종황제(純宗皇帝)가 황위(皇位)를 계승하면서 공식적으로 의친왕비로 책봉되었으며, 그 이후 1964년 별세(別世)하기 전까지 의친왕비로 불렸다.

1919년 11월 의친왕(義親王)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알려져 있는 의친왕 망명 미수 사건(義親王亡命未遂事件) 당시 의친왕비는 사동궁(寺洞宮)의 안주인으로서 의친왕이 이미 사동궁을 빠져나간 이후 그의 행방을 집요하게 물어보는 일제관리를 교묘하게 속이면서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려고 최선을 다하였으나 결국 의친왕이 단동(安東)역에서 일경(日警)에 의하여 체포되고 말았지만 일제에 저항하려고 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

한편 의친왕의 공식적인 자녀가 12남 9녀인데 여기에 의친왕비의 소생이 없었다는 점인데, 의친왕의 5녀로서 사동궁에서 오랫동안 의친왕비와 함께 살았던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 제하의 책에서 의친왕비를 “어릴 때부터 성품이 어질고 사리에 밝을 뿐만 아니라 학문도 뛰어나 맹자를 줄줄이 암송했고 붓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해서를 매우 잘 쓰셨던 훌륭한 분이셨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친왕비가 후손을 두지 못하였다는 점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인간적인 고뇌에도 불구하고 부실(副室)들의 많은 자녀를 마치 친자식같이 따스하게 대하였던 그 고매한 성품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의친왕의 7남 이해청(李海晴)에 대한 의친왕비의 애정은 각별하였는데, 이해청은 1921년생으로서 생모는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간호부(看護婦)로 활동하였는데 그가 어릴 때 생모가 사동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의친왕비가 그를 양육(養育)하였다.

의친왕비는 이광을 마치 친아들 같이 정성을 다하여 길렀는데 그가 7세 때 정동에 거주하는 남연군(南延君)의 3대 종손(宗孫) 이기용(李埼鎔)의 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하였으며, 서대문 소학교(西大門小學校)를 거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졸업한 이후 일본에 유학을 떠났다.

한편 이해청이 동경제대 독어학과(東京帝大獨語學科) 재학 중에 학병징집을 강요받게 되었으나, 황손(皇孫)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거부하다가 결국 함께 거부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함경남도 원산에 위치한 철공장으로 강제징용되어서 몇 개월 동안 일을 하다가 결국 신경쇠약증에 걸려 경성에 오게 되었을 때, 의친왕비가 이해청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안장된 남연군 묘소에 있는 재실(齋室)에서 요양을 시킨 끝에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952년 8월 12일 이해청이 부산 피난 시절에 32세라는 젊은 연령에 세상을 떠났을 때 의친왕비의 심적 충격은 컸을 것이다.

한편 1955년 8월 9일 시대의 풍운아였던 의친왕이 천주교에서 비오라는 세례명(洗禮名)으로 영세(領洗)하였으며, 이때 의친왕비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의친왕은 영세한지 7일 후가 되는 8월 16일 새벽 4시에 안국동 별궁(別宮)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葬禮式)은 명동성당에서 10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 의친왕비는 칠궁(七宮)에서 머무르다가 1964년 1월 14일 향년(享年) 8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끝으로 ‘시대의 풍운아 의친왕의 발자취를 찾아서’ 제하의 칼럼 연재를 마치면서 본 칼럼을 통하여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생애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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