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은 6.25전쟁 때 순정황후(純貞皇后)를 비롯하여 의친왕비(義親王妃), 삼축당(三祝堂), 광화당(光華堂)과 함께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으며, 환도(還都)한 이후 1955년 8월 9일 장면(張勉) 전(前) 총리(總理)를 대부(代父)로 하여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그로부터 1주일 후가 되는 8월 16일 새벽 4시 안국동 별궁에서 향년(享年) 79세를 일기(一期)로 시대(時代)의 풍운아(風雲兒) 의친왕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의친왕이 타계한 이후 처음에는 서삼릉(西三陵)에 안장되었으나 1996년 11월 29일 이미 금곡릉(金谷陵)에 안장되어 있었던 의친왕비 묘소와 합장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제 시대의 풍운아라 할 수 있었던 의친왕의 생애를 마무리하면서 그의 정비(正妃)였던 의친왕비의 생애도 함께 소개한다.

의친왕비의 아명은 ‘숙’이고 휘(諱)는 김덕수(金德修)이며,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으로서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친(私親)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11대손으로서 1880(고종 17)년 11월 21일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서 김사준(金思濬) 소생의 6남매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의친왕비의 유년시절(幼年時節)과 관련해 ‘한국개화여성열전’에 소개된 내용을 인용한다.

“조모님 슬하에서 금지옥엽같이 자라면서 국문, 한학, 글씨, 예의범절을 배웠다. 천품이 후하고 인자하여 어려서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종종 나들이를 나갈 때면 종일 집을 비우는 틈에 높은 쌀 뒤주에 발돋움을 하고선 쌀을 퍼내어 하인을 시켜 떡을 만들어 그들에게 골고루 나눠줘 배불리 먹이고 시침을 떼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의친왕비는 14세가 되는 1893(고종 30)년 삼간택(三揀擇)을 거쳐 의친왕과 안국동 별궁에서 길례(吉禮)를 올렸으며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으로 봉(封)하였다.

이와 관련해 ‘마지막 황실의 추억’ 제하의 책에서 의친왕비가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내용을 인용한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고양은 시골이었다. 외동딸이었던 나는 만날 남자 형제들과 밖에서 뛰어놀았고 장난이 심해서 우물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시집간다고 준비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신랑이라는 사람은 뒷모습만 보았고 남색 치마 노랑저고리를 입은 여자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 꿈을 꾼 지 얼마 안 되어 간택령이 내려졌다.

두 번의 간택을 거쳐 세 번째로 서울로 올라와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다. 궁에서 보내준 비단으로 급히 옷을 지어 입고 가마를 타고 궁궐에 가는 것이었다. 궁으로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께서 내게 ‘그곳에 들어가서 눈을 뜨면 큰일 나니 눈을 꼭 감고 있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궁궐에 들어가서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임금님이 나오셔서 내 앞에 오시더니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아라’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무섭고 떨려서 잠깐 눈을 뜨고 쳐다 뵙고 금방 감아 버렸다.

그 후 내가 최종 간택되었는데 아버지는 ‘우리 연안 김씨 가문은 인목대비 이후로 국혼을 않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목대비의 지엄한 유훈이오니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그랬더니 황제께서 ‘그때에 그런 일이 있었으나,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 괘념하지 말고 앞으로 다시 한번 잘해보자’라고 달래시어 하는 수 없이 네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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