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 부잣집 운조루,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200년이나 된 ‘쌀독’이 있다. 쌀을 빼낼 수 있는 아랫부분의 마개에는 “누구나 마개를 돌려서 쌀을 빼 갈 수 있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적혀 있다. (사진제공: 류응교)
“누구나 마개를 돌려서 쌀을 빼 갈 수 있다.”

[천지일보=김두나 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4일 이명박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 간의 오찬간담회에서 “나눔과 봉사활동에서도 최선을 다해 우리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도록 경제계가 앞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이 회장의 이 같은 발언에서 노블리스오블리제의 향이 살짝 풍기긴 했으나 그리 깊지는 않았다.

<조선의 거상 경영을 말하다>의 저자 한정주 씨는 “부는 이루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사회와 더불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기에 재물로는 재물을 지킬 수 없지만, 민심으로는 재물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부자 중 민심으로 재물을 지킨 대표적인 경우로는 단연 경주의 최 부잣집과 구례 운조루의 류 부잣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만석꾼 부자였다.

특히 류 부잣집 운조루에는 200년이나 된 ‘쌀독’이 있다. 구름 운(雲)에 새 조(鳥)를 쓰는 운조루는 ‘구름은 마음대로 산을 넘나들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가는데 나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도연명의 시에서 이름을 따 온 문화 류 씨의 고택이다.

운조루 쌀독은 쌀이 2가마니 반이나 들어가는 원통형 뒤주다. 쌀을 빼낼 수 있는 아랫부분의 마개에는 “누구나 마개를 돌려서 쌀을 빼 갈 수 있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적혀 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류 씨 집안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됐다고 전해진다. 동네에서 쌀이 없어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곳 운조루에서 태어난 류응교 전북대 교수는 “이 같은 타인능해 정신 덕에 6ㆍ25전쟁 때도 주민들이 앞장서 이 집만은 태워선 안 된다고 해서 집을 지킬 수 있었다”며 “현재의 재벌들은 가진 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다했던 옛 선조들을 본받아 진정한 노블리스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 부잣집의 타인능해 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주시 금암 1동사무소는 현관에 쌀뒤주를 설치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누구나 원하는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금암새마을금고와 통장협의회, 새마을부녀회 회원 및 일반 주민이 기증한 쌀을 담아두고, 아래 서랍을 열면 5명 정도가 한 끼 밥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쌀이 쏟아지도록 해둔 것이다. 금암동사무소의 쌀뒤주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낮보다는 밤에, 평일보다는 주말과 휴일에 찾아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읍시 입암면사무소를 비롯해서 광주광역시의 금호1동, 주월동, 백운2동, 월산5동, 화정3동과 강원도 인제군 남면사무소 등 전국 각지에서 지역 내 결식 주민들을 위해 사랑의 쌀뒤주를 운영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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