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는 물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탄산수 즉 ‘초수(椒水)’가 나오는 우물이 있다고 해서 ‘초정(椒井)’이라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 청주목편에 ‘초수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라고 나온다.

조선 전기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잡록집(雜錄集)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청주에는 초수가 있는데, 물은 따뜻하지 않으나 그 냄새가 후추와 같았는데 사람들은 이 물로 씻으면 안질이 잘 낫는다고 하였다. 세종께서 친히 임행하였고, 그 뒤에 세조께서 복천사(福泉寺)에 가면서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다.’라고 나온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때부터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조선의 제25대 왕)의 통치기에 이르는 470여년간의 왕조의 역사를 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 26년(1444년) 1월 27일 자를 보면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木川縣)과 전의현(全義縣)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內贍寺尹) 김흔지(金俒之)를 보내어 행궁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라고 나온다.

이후 세종은 왕비와 함께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는데, 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따라갔다. 조선 초기에는 초정리가 아닌 초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조선 중기의 학자 죽소(竹所) 권별(權鼈, 1589~1671)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물의 맛이 초와 같이 매우면서 시원한 물을 초수라 하는데 지금은 청안현(淸安縣) 서쪽에 초수정(椒水井)이 있는데, 우리 세종과 세조께서 일찍이 여기서 목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하는 말에, “이 물이 처음 나올 때 어떤 농부가 밭두렁 위에서 잠을 자는데 귓전에 은은히 여러 말(馬) 소리가 들려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문신이자 문장가인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초수부(椒水賦)’에 “吾聞淸州之境(오문청주지경, 내 듣건대 충청도라 청주 근처에), 椒水之里(초수지리, 초수리라 이름하는 마을 있는데), 山高水麗(산고수려, 산은 높고 샘물 맛은 좋은 데다가), 風淳俗美(풍순속미, 풍속 아주 순후하고 아름답다네)”라며 청주의 초수를 예찬했다.

‘전 만호 유면(柳沔)과 전 현감 정중건(鄭仲虔) 등을 전의현(全義縣) 초수에 보내서 병을 치료하게 하여 시험해 보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 26년(1444년) 4월 4일, 당시 충북 청주뿐만아니라 충남 전의현에도 초수(가 나와 유면과 정중건 등을 시켜 시험케 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세종 26년(1444년) 4월 15일에는 ‘병조에서 아뢰기를,“전의(全義) 초수 네 곳과 목천(木川) 초수 두 곳을 모두 수치하여 표한 안에는 잡수가 숨어들지 않게 하고 표한 이외의 논은 모두 경작하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나온다. 전의 초수와 목천 초수에 표를 하여 일반 물이 흘러들지 않게 한 것이다.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휴가를 청해 상주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영천(榮川)의 초수정에서 목욕하였다.

이산화탄소가 유입되는 지역에서는 높은 농도로 용해된 이산화탄소가 지질매체와 물과의 반응을 더욱 활발하게 하여 광물질 함량은 더 높아지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탄산수는 높은 광물질 함량을 함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근대 의학이 확립되기 전에는 광천수가 특정한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기록된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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