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삼 작가 개인전 가보니
시간·영화·성경·책 등 펼쳐놔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양평 성경 조형물도 ‘펼침’ 작품
“우주비행사처럼 조망해보길”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설치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최근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UNFOLD’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설치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최근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UNFOLD’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지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아마도 우주비행사와 신 두 존재뿐일 것이다. 우주비행사들은 지구에 발붙이고 있을 땐 볼 수 없는 지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고 난 뒤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설치미술가 전병삼 작가는 이처럼 일상에 있을 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물한다. 우주에 가지 않고서도 말이다. 전 작가는 “우리가 사는 곳을 한발 물러나서 차분히 바라보면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의미 있게 보인다”고 말한다.

최근 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를 찾았다. 개인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작은 유리병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병의 개수는 총 1만개. 이 유리병들은 철조망 모양의 펜스에 일일이 걸려있었다. 병을 자세히 보니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한 1년 치 달력이 보였다. AD1년부터 시작해 2년, 3년, 256년, 678년, 2120년, 5523년, 7742년… 1만년까지. 총 1만년의 시간이 1만개의 유리병 안에 담겼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전병삼 작가 개인전 ‘UNFOLD’의 작품. 1만개의 유리병 안에 총 1만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전병삼 작가 개인전 ‘UNFOLD’의 작품. 1만개의 유리병 안에 총 1만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이 유리병들이 걸린 펜스는 큰 종이를 구부렸을 때 불룩 솟아난 모양으로 전시회장 안에 들어서 있었다. 유리병 안에 담긴 시간을 보기 위해 바싹 다가갔다면 이번엔 한 발짝 물러나 펜스를 따라 걸어봤다. 몇 걸음 만에 유리병 속 시간은 수백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유리병의 뒷면에는 또 다른 시간이 펼쳐졌다. 이번엔 24시간을 1만 등분으로 쪼개놨다. 각 병에 담긴 시간은 약 8.7초. 1만년과 24시간이 한 유리병 안에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달력이 인쇄된 종이의 색깔에도 비밀이 있었다. 육안으로는 크게 노란색과 주황색 종이로 보였지만 병마다 색깔이 모두 달랐다. 각기 다른 1만개의 색깔이 합쳐져 ‘마젠타’라는 한 색상을 이뤘다. 다시 말해 마젠타색을 ‘1만 등분’ 해놨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전병삼 작가 개인전 ‘UNFOLD’의 작품. 1만개의 유리병 뒷면에는 24시간이 1만 등분돼 담겨 있다. 유리병 한 개에 약 8.7초가 담겼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전병삼 작가 개인전 ‘UNFOLD’의 작품. 1만개의 유리병 뒷면에는 24시간이 1만 등분돼 담겨 있다. 유리병 한 개에 약 8.7초가 담겼다. ⓒ천지일보 2023.05.24.

전 작가의 개인전 ‘UNFOLD’는 이런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영어 동사 unfold는 ‘접는다’는 뜻의 동사 fold의 반의어로 ‘펼친다’는 뜻이다. 전 작가는 한눈에 전체를 보기 어려운 대상을 한 화면에 볼 수 있도록 펼쳐놨다. 유리병 작품처럼 시간뿐 아니라 영화 장면도, 기독교 경서 성경도, 인문학책도 펼쳐놓아 관객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해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한다.

전 작가는 대형 설치 조형물로 유명한 현대미술가다. 홍익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시카고예술대학에서 미술 석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학석사를 마쳤다. 지난 2015년 청주국제비엔날레에서 연초제조창 건물 외벽에 48만 9440장의 폐 CD로 만든 거대한 설치 조형물로 이름을 알렸다. 최근 경기도 양평 안데르센 묘원에 설치된 대형 성경 조형물도 그의 ‘펼침’ 시리즈 중 하나다. 본지는 전 작가를 그의 개인전에서 만나 작품 이야기를 들어봤다.

◆“도자기 깨는 장인처럼 만든 작품”

전 작가는 개인전 안쪽 공간에 걸린 한 작품을 소개했다. 이 작품은 짙은 파란색 배경에 노란색 선들이 중심에서 만나 빛(*)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빛 모양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작품 속엔 ‘성경책’이 펼쳐져 있었다.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장부터 마지막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전체 150만자를 일일이 타이핑했다. 그런 다음 성경 속 ‘복(福)’이란 글자는 모두 찾아서 노란색 선으로 연결해 만든 작품이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전병삼 작가 개인전 ‘UNFOLD’의 작품. 빛으로 보이는 이 작품 안에는 성경 전체 150만자가 인쇄돼 있다. 성경 속 ‘복(福)’ 자를 모두 연결해 만든 작품이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전병삼 작가 개인전 ‘UNFOLD’의 작품. 빛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는 성경 전체 150만자가 인쇄돼 있다. 성경 속 ‘복(福)’ 자를 모두 연결해 만든 작품이다. ⓒ천지일보 2023.05.24.

전 작가는 언뜻 보면 컴퓨터로 쉽게 만들었을 것 같은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갔는지 설명했다. 그는 “이 정도로 방대한 양의 글자를 한 페이지에 밀어 넣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빛 모양을 잡기 위해 글자 크기와 자간을 계속 조정해야 했는데, 하나만 조정해도 150만 글자 전체가 움직였던 까닭이다. 그는 인쇄 과정에서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보통 종이에 인쇄하면 큰 글씨야 잘 보이지만 1㎜ 정도 크기의 글자에서 ‘ㄹ’이나 ‘ㅎ’은 점이 되고 말았던 것. 전 작가는 해외에서 구한 특수한 종이에 몇백년 이상 보존할 수 있는 기름 안료를 써서 인쇄했다.

인쇄한 후엔 돋보기로 살펴보며 완벽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출력했다. 그는 “항아리 공방에서 도자기를 깨고 좋은 것만 남기듯 이 과정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쇄된 2점을 액자 공장에 넘겼다. 하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액자가 완성돼 작업실에 도착한 뒤 남아있는 종이와 컴퓨터 원본 파일을 지웠다. 그는 “이건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설치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최근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UNFOLD’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설치미술가 전병삼 작가가 최근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UNFOLD’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깨달음? 해탈? 똑같이 고민하며 살아”

전 작가는 개인전에 있는 작품들은 모두 이런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 물으니 그가 “이게 전업 작가인 저의 일”이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1977년생인 전 작가의 아버지는 중동에서 건설업을, 어머니는 미싱을 했다. 부모의 생업은 그의 미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제 작품은 멀리서 보면 아버지가 지은 집처럼 구조적인 느낌이고, 가까이서 보면 엄마 의상실에서 보던 단추 스팽글, 실크 같이 부드럽고 예쁘고 반짝반짝하죠. 그 둘이 합쳐져서 제가 만들어졌어요. 전 그런 미감을 갖고 있어요.”

그의 작품은 미감도 뛰어나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은 성찰이 관람객에게 신선한 영감을 준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해탈했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나온 게 아니다”며 겸손해했다.

“저도 똑같이 일상을 살고 하루에 생활 고민, 경제적 고민, 관계에 대한 고민 등 많은 고민을 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본질적인 고민도 하고요. 그 고민을 어떻게 나답게 풀어갈까 생각하다 보니 제 직업이고 제 일인 작품 활동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복작복작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한발 물러나겠단 마음의 의지를 작품으로 표현한 거죠.”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최근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열린 전병삼 작가의 개인전 ‘UNFOLD’에서 한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최근 서울 강남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열린 전병삼 작가의 개인전 ‘UNFOLD’에서 한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5.24.

◆“성경의 벽, ‘펼침’ 작품으로 봤으면”

그는 지난달 9일 부활절에 공개한 경기도 양평의 성경 조형물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이 작품은 스테인리스 소재의 정사각형 패널 6770장에 개역개정판 성경 전체 148만 9120자가 새겨졌다. 본래 이름은 ‘펼침: 성경(UNFOLD: The Bible)’이지만 작품 소장자가 지은 ‘성경의 벽’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전 작가는 “성경의 벽이라고 하면 ‘성경이 걸려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돼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며 “정식 명칭인 ‘UNFOLD 펼침’으로 불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자신도 크리스천이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개인전엔 기독교의 창조론을 부정하는 책 ‘사피엔스’와 ‘직지심체요절’을 펼친 작품이 그림과 메이킹 영상으로 전시돼 있었다.

◆“보이지 않던 것들 볼 수 있길”

전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 관객들이 우주비행사와 같은 경험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좁은 시야로 틀에 박힌 방식으로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발 물러나서 보면 지금 당장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들도 조금은 더 열린 마음으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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