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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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2022.09.16

<19>전자산업 진출 선언한 현대그룹

마쓰시다 회장·全대통령 권유로

반도체사업 출사표 던진 정주영

이병철 반대했지만 소신껏 추진

 

전자사업 갈등으로 관계 멀어져

‘반도체 인재 영입’ 최우선 과제 

파격조건 스카우트, 모집광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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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10일 현대전자 이천 종합전자공장 준공식(좌측에서 네 번째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이날 정몽헌(좌측 맨끝) 회장은 전자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제공: 현대그룹)

국내 경제계의 양대 산맥으로 분리되는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주로 소비재 품목인 식품, 의류, 전자 등으로 성장)과 크고 웅장한 사업을 하는 아산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건설, 중공업, 자동차 등)은 국내 재계에서 1위와 2위를 다투던 영원한 라이벌 기업이다.

삼성그룹은 이미 1970년대 당시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대한 미래 희망을 품고 사비로 부도 위기에 몰린 한국반도체(강기동 박사가 설립)를 자본금의 50%인 50만불에 과감하게 인수하고 작게나마 전자시계용 반도체인 IC를 생산했다. 이건희 회장의 적극적인 반도체사업 투자 권유로 생각을 바꾼 이병철 회장은 일본 NTT에서 근무하면서 이병철 회장의 멘토 역할을 하던 ‘하마다 시케노게 박사’를 자주 만나면서 반도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갔다. 이병철 회장은 마침내 1983년 2월 8일 ‘도쿄선언’을 하며 메모리반도체 사업에 대규모 투자키로 결정, 경기도 기흥에 부지를 매입하고 공장 건설을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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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현대전자산업 창립 당시 이천사업장 조감도. (출처: SK하이닉스 홈페이지)

◆‘라이벌’ 삼성 이기기 위해 전자사업 진출

이때 정주영 회장 역시 삼성그룹을 이기는 방법은 경박단소한 반도체와 통신 분야의 전자사업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박단소(輕薄短小)’는 글자 그대로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을 말한다. 

그 동기는 일본 재계 1위 기업인 마쓰시다전기(현재 파나소닉)의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과 전두환 대통령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 보라”고 권유한 것을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정주영 회장은 “큰 것뿐만 아니라 작은 것에서도 삼성을 이기면 영원히 1위 기업을 수성할 수 있다”며 고민 끝에 반도체사업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즉시 핵심 참모인 종합기획실의 최고 책임자를 미국으로 보내서 강기동 박사를 면담하고 반도체사업 진출에 대한 조사용역을 계약했다.

당시 강기동 박사는 “한국반도체를 시작할 1970년대와 현 상황이 전혀 다르다. 반도체회로나 제조설비 모두가 막대한 자금이 투입돼야 하고 반도체 제품이 성공적으로 생산돼도 고객사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므로 회사가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으로 출장 간 핵심 참모는 “우리 현대는 정주영 창업주 회장이 한번 결정한 이상 이와 같은 리스크 위험은 각오하고 있다”라며 재차 설명하고 “정주영 회장은 한번 한다고 결정하면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돌격형 경영자”라고 답했다. 그러자 강기동 박사는 “한국에서는 64K DRAM을 주력제품으로 개발하고 생산 판매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용역보고서를 정주영 회장에게 보냈다.

현대그룹은 강기동 박사의 용역보고서를 근간으로 반도체를 포함한 통신 분야 전자사업에 진출할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1982년 11월 17일 상공부에 제출했다. 즉 1983년에서 1987년 5년간을 3단계로 나누고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부터 투자, 생산에 2900억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었다. 1983년 1월 1일 현대중공업 산하에 전자사업팀이 신설됐고, 드디어 1983년 2월 23일 현대전자산업㈜가 직원 500명, 자본금 100억원으로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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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왼쪽)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이병철, 반도체사업 놓고 ‘신경전’ 

어느 날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단독으로 식사할 자리가 마련됐는데, 불쑥 정주영 회장은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제안했다.

정 회장은 “형님, 저도 이제는 무겁고 중대한 사업에서 벗어나 전자사업인 반도체와 통신사업을 할 것이오니 반대하지만 마시고 협력해 달라”고 했다. 이 말은 들은 이병철 회장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지면서 즉시 현대그룹의 반도체사업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이 회장은 “아우, 내가 지난 10년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경영해보니 적자만 늘어가고 별 뾰족한 해결 방법이 안 보여 후회도 막중하다. 아들 이건회 부회장이 내가 반대했으나, 독단적인 판단으로 저지른 일이라서 적자 회사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끌어가고 있다. 반도체사업에 대한 사업 의지를 포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한번 결정하면 밀고 나가는 성격의 정주영 회장은 즉시 반격했다.

정 회장은 “형님도 전자사업을 시작할 때 사돈 기업인 금성사(현재 LG전자)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끝내 전자사업을 밀어붙여서 번듯하게 오늘날의 삼성전자로 성장시켰으니 저는 삼성과는 친인척 사돈 관계도 없으므로 반대하지 말라”면서 식사 자리를 마쳤다.

이후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사이는 전자사업의 갈등으로 인해 점점 관계가 서먹서먹하게 멀어져 갔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현대그룹의 반도체사업 진출이 구체화하자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도 반도체 메모리 사업에 힘을 쏟으며 기흥 단지 반도체공장 조기 완공에 속도를 냈다. 즉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개발 배경에는 라이벌 기업인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선의의 경쟁에서 촉발된 측면이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또한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도 현대그룹의 주력사업인 건설업과 중공업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현대그룹과 무한경쟁에 들어갔다. 이렇게 설립된 현대전자는 우선 반도체 인재를 영입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당시 현대전자 측은 1차로 미국 산호세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면서 금성반도체의 전자교환기용 트랜지스터 개발의 고문으로 일하던 서울공대와 미국 스탠퍼드 공대에서 전기공학 박사로 반도체 분야 권위자인 천동우 박사를 미국 현지에서 만났다. 현대전자 측은 “급여는 당신이 부르는 대로 지급할 것이니 제발 귀국해 현대전자의 반도체사업본부장(직책은 부사장)을 맡아 달라”고 삼고초려를 하면서 천동우 박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필자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천동우 박사의 급여가 미국회사보다 3배 이상 인상한 조건이며, 한국으로 돌아오면 압구정동 최고급 현대아파트 제공, 청소 및 식사를 준비하는 직원 채용, 당시 기준 최고급 승용차와 운전기사 제공 등이었다.

어렵사리 천동우 박사를 한국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한 현대는 다음 단계로 삼성전자와 금성반도체에 근무 중인 우수인력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하고, 현대 스카우트 담담자가 삼성과 LG 기술 인력을 대상으로 일대일로 만나서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삼성전자와 금성반도체도 내부 단속을 하면서 자사의 기술 인력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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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0월 현대전자가 국내 최초로 양산에 돌입한 256K D램. (출처: SK하이닉스 홈페이지)

◆파격조건 내걸며 우수인력 영입에 사활

현대 스카우트 담당은 일반식당에서 점찍어 놓은 최우수 기술 인력을 만나면 노출 우려가 있기에 호텔방에서 만나기로 비밀리에 약속했다. 호텔방 안에서 단둘이서 협상하고 협상 조건에 합의가 되면 현대전자로 비밀리에 이적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직책이 대리인 자는 과장, 과장은 부장급으로 승진시켰고, 급여는 본인이 희망하는 급여를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스카우트된 기술자가 결혼했으면 거주 아파트 전세도 현대전자가 제공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알려졌다. 관리 인원은 현대그룹 내부에서 최우수 인원을 선발해 현대전자로 발령해, 스카우트돼 근무 중인 직원들이 근무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일사불란하게 지원 업무를 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스카우트한 기술자들이 100여명에 이르자 삼성전자와 금성반도체가 언론플레이하면서 부당 스카우트라고 고소했고 스카우트된 인력의 원대복귀를 요구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발생했다. 하지만 직업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할 자리 선택은 근로자 스스로가 하므로 이 소동은 얼마 가지 않고 잠잠해졌다. 

그래도 인력이 부족했던 현대전자는 주요 일간지(조선, 동아, 중앙)와 경제신문(매일, 한국) 한 면 전체를 채우는 모집 광고를 내고 인력을 보강했다.

초대 대표이사는 정주영 회장이 직접 겸직하다가 아들인 30대의 정몽헌 회장에게 대표이사를 맡기면서 현대전자는 오너가족이 직접 경영하는 체제로 비상하게 된다.

처음에는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곳에 공장을 세우려고 했으나, 당시 정부의 실권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그곳에 정부 중요기관을 유치할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지방이지만 부지가 넓고 큰 이천시 부발면에 공장과 연구소를 세울 것을 지시했고, 지금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됐다. 또한 반도체사업본부장인 천동우 박사의 제안으로 미국 산호세 실리콘밸리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해 반도체에 대한 연구개발, 현지 경쟁사의 연구 진행 상황과 시장자료조사 및 인력 스카우트 등의 업무도 병행시켰다.

(정리=유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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