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image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08.26

<16>정주영 회장과 500원 지폐 속 거북선

조선소 지을 건설자금도 없는 현실

돈 빌리러 해외로 향한 정주영 회장

미국·일본 등 차관 요청에 냉담반응

 

조선소 없이도 당당한 모습으로 설득

英 버클리은행 차관 승인·선박 수주

현대중공업 건립 동시에 유조선 건조

image
현재 울산 전하만과 미포만에 위치한 현대중공업.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현대그룹 창업자인 아산 정주영 회장은 모기업 현대건설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아도 서비스로 시작한 현대자동차도 안정을 찾아가자, 정주영 회장은 새로운 사업 도전을 준비하던 차에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초빙을 받고 단독 면담을 했다.

당시 서독 정부가 경제정보를 제공하면서 얻은 영감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후배인 박태준을 불러서 제철공장을 포항시에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불철주야’ 노력 끝에 포항제철의 용광로가 성공적으로 가동을 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철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조선 사업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됐다. 이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본인이 생각하는 자주국방(탱크, 중장거리용 대포, 기관총 등)의 시작과 동시에 국민들의 일자리 창출도 모두 가능해져 속담처럼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고 박 대통령은 판단했다.

 

◆鄭회장, 朴대통령에 “조선 사업 성공시킬 것”

이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무자인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큰 사업을 성공시킬 유일한 사람은 정주영 회장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추천했다.

이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시 본인의 성격과 생각, 마음가짐이 100퍼센트 잘 맞는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호출해 조선 사업을 정 회장에게 제안했다.

자동차에 철강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던 아산 정주영 회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 각하 저는 대통령을 위해 제 한 몸을 던지겠습니다. 지금은 국가 경쟁력이 워낙 부족해서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앵무새가 되어도 좋고 자존심이 짓밟혀도 좋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자존심 버리고 조선 사업을 간곡히 부탁하는데 제가 못한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한번 멋지게 조선 사업을 성공시키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니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정부를 책임지는 최고 경영자이므로 내 명예를 걸고 최대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공장은 현대자동차공장이 위치한 울산으로 하고 토지매입에 정부도 협조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장을 건설할 부지도 문제이지만 조선 사업에 투입되는 건설자금을 당시 정부가 지원할 여건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전쟁 말고는 어려운 일도 “항상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춘 정주영 회장은 최대 조선 사업국인 일본을 방문하고 차관도입을 요청하자 일본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리고 최우방국인 미국, 캐나다 등의 금융회사들도 문전박대를 하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정주영 회장은 낙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1차 차관도입’ 실패에 대해 보고하게 됐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만약 현대그룹에서 포기한다면 국가사업에 있어 현대건설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에 정 회장은 국가가 절실하게 원하고 한나라의 대통령이 그토록 염원하는 조선 사업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결의를 하고 이번이 해외차관 도입에 마지막 도전이라는 당찬 각오를 새롭게 하고 즉시 영국 런던으로 출장길에 나섰다.

image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鄭회장의 순발력 빛난 ‘500원 지폐’ 일화

당시 자료는 울산시에 조선소를 건설할 부지 땅 사진과 5만 분에 1 축척 지도를 갖고 간 것이 유일했다. 정주영 회장은 1차로 조선기자재 업체를 방문해 “당신네 회사에서 조선기자재를 구입할 것이니 은행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고, 소개받은 영국 버클레이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한 조선 기술회사인 선박 컨설턴트 전문기업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보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보텀 회장은 정주영 회장이 제공한 울산시 작은 어촌마을 사진과 지도만 보고 난색을 표현했다.

당시 경제 규모가 북한보다도 미약한 대한민국 경제상황과 “현대그룹의 능력만으로는 이 조선 사업이 무모하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 

그러자 순발력과 기획력 및 임기응변이 풍부한 정주영 회장은 갑자기 호주머니에 넣어둔 500원짜리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가 생각났다.  

정 회장은 즉시 500원 지폐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면서 “대한민국은 500년 전에 이미 철갑으로 무장한 거북선을 만들어서 일본의 해군과 싸워서 백전백승한 국가로서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아주 강한 톤으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넬슨 제독이 있다면 한국에는 넬슨보다도 위대한 이순신 제독이 있다”고 강조했다. 

image
1971년 영국 버클리 은행과 조선소 건설 차관 도입 서명을 마친 아산.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그러자 롱보텀 회장은 500원 지폐를 꼼꼼하게 살펴봤는데 앞면에는 국보 1호인 남대문이 뒷면에는 거북이와 비슷한 배가 그려진 것을 확인하고 “당신들의 선조들이 실제로 이 배를 전쟁에 사용했다는 게 맞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정 회장은 “그렇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역사와 우수한 두뇌를 보유한 나라다. 불행하게도 6.25전쟁 발생으로 산업화가 지연됐고, 그로 말미암아 좋은 아이디어가 묻혀 있었지만, 잠재력만은 세계에서 으뜸”이라면서 “우리 현대그룹에서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를 짓고 최고의 선박을 제조해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거북선은 철로 제조한 함선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거북선을 만들어 냈고 이 배로 일본을 물리쳤다”고 강조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당당한 모습으로 롱보텀 회장을 설득했으며, 결국 수많은 화려한 프레젠테이션과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롱보텀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인 이유는 500원짜리 지폐 한 장에서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낸 정주영 회장의 의지로 평가된다. 마침내 롱보터 회장은 오케이 사인을 하고, 즉시 영국 버클리 은행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선사가 싼 선박을 구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정주영 회장의 조선 사업을 지원했다.

버클리 은행을 찾아가서 롱보텀 회장의 컨설팅 ‘오케이 추천서’를 제출했지만, 버클리 은행은 ‘1차 차관대출’을 거절했다. 이유는 차관을 빌려줘도 선박수주를 따내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사유를 내렸다.

image
1974년 6월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건조 한 애틀랜틱 배론 호.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조선소 없이도 파격조건으로 선박 첫 수주

그러자 아산 정주영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차남인 리바노스가 선박을 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리바노스를 만나러 그리스로 출장을 갔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아주 멋진 한판 승부를 하고 선박을 수주했다. 

정주영 회장은 “아직 조선소는 없으나 울산에 건설할 예정이고 배를 만들어 본 적은 없으나 만들 수 있다”며 “리바노스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사진에 나온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당신의 배를 만들어서 납품하겠다”라는 상식에 벗어난 설득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정면 돌파하고 계약을 따냈다.

정주영 회장은 과거 고령고 복구공사와 마찬가지로, 납기를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겠고, 배에 하자가 생기면 원금도 반환한다는 파격 조건으로 정면승부를 내걸었기 때문에, 리바노스의 전적인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계약으로 결국 영국 버클리 은행에서 현대그룹에 4300만 달러의 차관 승인을 해줬다.

정 회장은 납기를 지키기 위해 리바노스가 주문한 선박 2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메웠다. 또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며 14만평의 조선소 공장을 건설했다.  

image
1978년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용 도크 앞에서 정주영 회장의 모습.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최대 선박 건조 능력 70만톤, 부지 60만평, 70만톤급 드라이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1단계의 준공을 한 시기가 1974년 6월로서, 기공식을 한 1972년 3월로부터 2년 3개월 만이었다. 현대는 최단 시일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해냄으로써 세계 조선 사업 역사에 신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정주영 회장식의 기상천외한 공법으로 빠르게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납기에 맞게 선박을 제조하고 선주인 그리스 리바노스에게 무난하게 선박을 납품하면서 신용을 얻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자랑스러운 세계 1위 조선기업 현대중공업이며, 이는 정주영 회장의 개척정신의 큰 성과로 알려졌다.

여담으로 정 회장은 조선소 건설 현장을 자주 방문하고, 노동자들의 회식 자리에 사전 약속 없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씨름과 팔씨름을 벌여 모두 이긴 후 노동자들과 막걸리 한잔을 하면서 껄껄 웃었다. 막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신바람 나게 일할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선소 건설 업무에 집중하게 만든 위대한 기업가 정주영 회장을 필자는 다시 한번 더 상기해 본다.

(정리 = 유영선 기자)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