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층에서 행하던 결혼 풍습
어린 나이에 일꾼 입장으로
팔려나가듯 며느리로 들어와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미국 종군기자가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농촌 타작마당의 모습을 촬영한 컬러사진을 본지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입수해 단독 공개한다. 미 종군기자는 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모습을 컬러사진으로 촬영해 남겼다. 그 덕분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옛 과거를 향유할 수 있는 선물이 됐다. ‘보릿고개’를 겪은 어른 세대들에게는 향수를 주고 젊은 세대와 함께 과거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진들이다. 더구나 당시 컬러필름은 상당히 귀하던 때며 1950년대에 컬러사진으로 남긴 사진들은 극히 드물었던 시대라 희소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미 종군기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전쟁터를 오가며 수만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촬영했다. 본지는 앞서 종군기자가 수원과 인천, 경기도 일대에서 찍은 컬러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우선 종군기자가 촬영한 사진은 농촌 타작마당 모습으로 한쪽에는 지게가 놓여 있고 마당에는 볏짚이 깔린 채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 2명이 타작을 하고 있다. 담벼락에는 볏짚을 묶어 걸어놨으며 왼쪽에는 요강도 보인다. 눈여겨 볼 것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딱 봐도 왜소한 체구인데, 몸집만 보면 이제 갓 10대가 됐을 법한 나이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머리에 쪽을 지고 있다는 것. 이는 남들에게 시집간 여성임을 알려주기 위한 표시였으며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어린아이 같은 며느리가 타작하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얼핏 보면 모녀 관계임을 우선적으로 추측할 수 있겠으나, 머리에 쪽을 지고 있기 때문에 몸집이 작고 가녀린 꼬마 여성이 며느리의 입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당시 우리나라 고유 풍습인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게 된 풍경이다.
민며느리 제도는 장래 성인이 되면 아들과 혼인시키기 위해 어릴 적부터 우선 데려와서 기르는 여자아이를 일컫는다. 주로 빈민층에서 경제적인 이유에서 이뤄진 결혼 풍습이다. 당시 대가족이 대부분이라 처가에서는 식솔 하나라도 빨리 줄여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한 이유였고, 시댁에서는 대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면서 오로지 일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소 한 마리 사는 것보다 민며느리 하나 데려오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밭을 갈거나 일을 하는 소 대신 여성이 그 일꾼의 입장으로 팔려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부터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강했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민며느리 제도는 여성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택권이 없는 존재로 평생을 살아가게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랑하는 남자를 직접 선택할 수도 없을뿐더러 남녀 간 사랑을 느낄 여유조차 없이 한평생을 소처럼 일만 하며 애기를 낳는 존재로만 살아야 했던 것이 민며느리 여성이었다. 어린나이에 뛰놀고 또 공부하며 보내야 할 학창시절을 소처럼 일만 하며 즐거움이나 행복한 추억거리조차 없이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성의 심정, 이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불만 없이 묵묵히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사진을 통해 느낄 수가 있다.
절구질을 하고 있는 모습의 또 다른 사진 역시 고통스런 민며느리 풍속을 알 수 있다. 사진은 1890년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유리원판 필름에 색을 덧칠한 채색컬러의 사진이다. 오른쪽 소녀 역시 머리에 쪽을 지고 있어 시집간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맨발로 자신의 몸집보다 더 긴 절구공을 잡고 절구질을 하고 있다. 100년 훨씬 이전에도 우리 조상들이 당연하게 살아왔던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사진은 1910~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역시 유리원판에 색을 입힌 채색컬러 사진이다. 이번엔 어린아이 남성의 모습으로 나뭇가지나 볏짚 등을 잔뜩 싣고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이다. 발은 맨발이다. 선교사가 카메라로 찍는 순간 잠시 멈추고 포즈를 잡아 보고 있다. 어릴 적부터 여성이나 남성은 고된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리네 보통 서민들의 삶이었다.
한편 당시 미국 종군기자들은 8명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열린 바닷길을 통해 입국했는데 이들은 전쟁과 피난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당시에는 컬러 사진이 귀했기 때문에 이들은 중요한 순간에만 컬러로 찍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컬러에 담았던 사진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이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는 장면들이었다. 표정을 더 생동감 있게 담는 데에 컬러사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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