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대통령 선거의 동교동 투표소 모습이다(1967)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천지일보 2022.3.8
제6대 대통령 선거의 동교동 투표소 모습이다(1967)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천지일보 2022.3.8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소중한 한 표 행사하세요.’ 제20대 대통령 선거 날이 다가왔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한 투표. 이날만큼 온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 날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서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과거 왕위가 계승되던 조선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을까. 왜 대통령 선거는 수요일일까. 그 궁금증을 역사를 통해서 알아보자.

◆초대 대통령, 압도적 지지율

초대 대통령 선거는 광복 이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선거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이뤄졌다.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과 한국독립당 김구가 대결했다. 투표 결과는 이승만이 92.30%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얻었다. 김구는 6.67%였다. 부통령은 이시영이 당선됐다.

대통령 임기 4년째인 1952년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직접선거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이 6·25전쟁 동안 시민들을 남겨둔 채 서울을 빠져나갔고, 국회의장이 수도 사수 결의문을 들고 대통령을 찾아갔지만 이미 떠난 상태였었다. 그렇기에 이승만이 ‘간접선거제(간선제)’로 국회에서 다시 당선되기는 어려웠다. 이로 인해 이승만 정부가 ‘직접선거제(직선제)’ 관련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반대표에 의해 부결됐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1952년 7월 4일 군과 경찰을 동원해 국회를 둘러쌌고, 찬성을 나타내는 공개투표를 통해 직접선거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선거가 실시됐고,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헌법대로라면 이승만은 2번의 대통령을 마치고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1954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이 원내 다수를 차지하자 헌법을 개정해 이승만의 종신 집권이 가능토록 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가 주요 골자였다. 개헌안 국회 의결을 두고 비밀투표가 진행됐는데, 재적인원 수의 2/3 이상이 찬성해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재적 203명 가운데 135명이 찬성하게 됐다. 수치로는 ‘135.333…’이었다. 136명의 찬성표를 얻지 못해 개헌안 부결되고 만다. 하지만 다음날인 11월 28일 ‘사사오입(四捨五入)’, 즉 ‘4이하는 버리고, 5이상은 올린다’는 수학 반올림 원리를 적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3선에 도전했고, 대통령 선거에서 70.0%를 득표해 장기집권의 밑자락을 깔았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중임 제한 철폐로 4선에 도전하는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과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맞섰다. 하지만 조병옥 후보는 선거유세 중 신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2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자유당은 이미 두 차례의 무리한 개헌, 부정부패 만연 등으로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고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 깡패, 완장 부대 동원을 통해 야당 선거를 방해했다. 급기야 투표당일에 투표자를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투표를 실시했다. 선거 전날일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힌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넣었다. 그러자 민주당은 선거가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날 오후 늦게 마산을 비롯해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4월 19일에는 학생 시위대가 경무대(오늘날 청와대)까지 진출했다. 바로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3·15 정·부통령 선거 시 이승만 대통령 투표 모습. 자하동 제1투표구에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모습이다(1960, 왼쪽), 제5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보고 있는 시민들(오른쪽)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천지일보 2022.3.8
3·15 정·부통령 선거 시 이승만 대통령 투표 모습. 자하동 제1투표구에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모습이다(1960, 왼쪽), 제5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보고 있는 시민들(오른쪽)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천지일보 2022.3.8

◆최장기, 최단기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는 48년 정부수립 이후 총 9번의 헌법개정을 거치면서 직선제와 간선제를 오갔다. 간선제는 1대, 4대, 8~12대 때 실시됐고, 직선제는 2~7대, 13~19대 때 실시됐다. 특히 4·19를 전후해서 선거가 직선제와 간선제로 두 번 실시되기도 했다. 직선제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국민이 직접 투표를 해 선출하는 방식이다. 간선제는 대통령 선출 시 국민을 대표하는 선거인단을 만들고 선거인단에의 투표로 대통령이 결정된다.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이 간선제로 선출됐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 최장기 임기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무려 16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 반면 최단기 임기는 최규하 대통령의 8개월이었다. 취임 당시 최연소 대통령은 박정희로 당시 46세였고, 최고령 대통령은 김대중으로 74세였다.

◆우리나라 선거일은 왜 수요일인가

대통령 선거일인 수요일이다. 이는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공직선거법에 대통령 선거는 임기만료일 전 70일 이후 첫 번째 수요일로 규정돼 있다. 수요일이 아닌 다른요일이 선거일일 경우 연휴를 이용해 개인일정을 보는 등 투표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수요일로 정해졌다.

우리나라의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역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어땠을까. 1987년 13대 89.2%, 1992년 14대 81.9%, 1997년 15대 80.7%, 2002년 16대 70.8%, 2007년 17대 63.0%로 꾸준히 하락세를 이어왔다. 그러다 2012년 18대 75.84%, 2017년 19대 77.2% 등을 보였다.

올해는 ‘오미크론’ 확산으로 확진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대선 당일인 9일은 투표에 참여하는 확진, 격리자 수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동선에 혼선이 올 경우 확진자가 늘어날 우려도 크다. 또한 고령층 지지자들의 경우 본투표일에 참여를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 투표율이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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