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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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0년대 후반 청주 서문시장 안에 해장국집을 하는 구두쇠 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별명이 욕쟁이였다. 해장국집에 드나드는 고객에 대해 존댓말을 쓰는 법이 없고 해장국을 남기기라도 하면 입에서 욕과 함께 불호령이 떨어진다. “다 XXX, 복 나가게 남기면 디어?!.”

어느 날은 충북 도지사가 새벽에 장관을 안내해 해장국집을 찾았다. 장관이 해장국을 먹다가 반쯤 남기자 거침없이 욕이 나온다. 장관이 놀란 표정을 짓자 지사가 ‘장관님이십니다’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응수가 걸작이다. “장관이면 다여? 아까운 음식을 왜 남기구 XX이여?!.”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가 큰일을 했다. 평생 모은 전 재산 15억여원을 지역인재 양성에 써달라며 충북대에 기탁한 것이다. 필자는 지인의 제보로 제일 먼저 발표장으로 달려갔다. 장학기금으로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공표하는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인자하고 빛이 났다. 이름은 김유례 할머니로 1997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할머니의 의로운 일이 알려진 후 청주에서는 잇달아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하는 일이 많았다. 1999년 1월 충북대에 12억 상당의 건물을 기탁하고, 지난 2012년 90세로 별세한 최모 할아버지는 IMF 한파로 힘든 시기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줬다.

이분들은 부자로 태어난 이들이 아니다. 온갖 고생을 하며 천원, 이천원 억척같이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쓰도록 한 것이다.

우리 민속에서 어린아이를 점지해주는 신은 삼신할머니다. 아기를 태어나게 해주면 여신이다. 할머니의 손은 약손으로 통한다. 어린 손자의 아픈 배를 쓰다듬어 주던 자애로운 손이었다. 달이 떠오르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복을 간절히 빌었던 손이기도 했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산정리에 ‘배 큰 애기 할머니’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500여년 전, 마을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아이를 낳게 됐다. 할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자손들이 번창하길 기원하며 산정리에 은행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산정리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 은행나무에 배 큰 애기 할머니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 신물로 섬겨진다.

할머니 선행의 원조는 조선 정조 때 제주부자 만덕이다. 만덕 할머니는 기생 출신이었으나 객주로 돈을 벌어 재해로 굶주리는 제주도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했다. 정조는 만덕을 궁으로 불러 친견하고 소망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만덕이 여성으로서는 갈수 없는 금강산 구경을 원했다는 얘기가 회자 되고 있다.

성남시 대장동 택지 개발사업 당시 천문학적 이권문제로 대권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성남에 사는 80대 할머니가 노점상 등으로 어렵게 모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해 감동을 주고 있다. 성남시 중원구에 사는 81세 홍 할머니는 자신의 4층 규모 단독주택(약 5억 5천만원 상당)을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행복한 유산’으로 등록, 저소득 계층 복지기금에 쓰도록 했다. 또 안암동 한모 여사는 고려대의료원에 발전기금 5억 65만원을 전달했다.

이들의 선행은 재벌이 수백억을 기부하는 것보다 더 값지다. 훌륭하신 할머니들의 자애로움이 살아있는 한국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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