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경복궁 동궁 남쪽 대형화장실 유구 발굴 현장에서 함께 확인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기계관 기둥 ② ‘조선물산공진회’ 광고지. 일제는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업적 과시, 계몽과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행사를 열었다 (출처: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 2021.7.20
① 경복궁 동궁 남쪽 대형화장실 유구 발굴 현장에서 함께 확인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기계관 기둥 ② ‘조선물산공진회’ 광고지. 일제는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업적 과시, 계몽과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행사를 열었다 (출처: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 2021.7.20

궁궐 내 대형화장실 발견돼
20년 간 사용한 것으로 추정
일제에 짓밟힌 흔적도 나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역사가 살아있다’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걸까. 마치 한 때를 기다린 듯 유적은 컴컴한 세상을 이기고 빛으로 나왔다. 지난 8일 경복궁 동궁 남쪽 지역에서 발굴된 대형 화장실은 그 규모에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현장은 생생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제에 짓밟힌 뼈아픈 역사도 담겨 있었다. 이곳 유적은 마치 그때의 아픔을 알아달라고 하듯 민낯을 드러냈다.

◆정화시설 갖춘 대형 화장실 유구

경복궁 동궁 남쪽 발굴현장에는 좁고 긴 네모꼴의 석조(돌조각)가 둘려있는 구덩이가 눈에 띄었다. 길이만 10.4m였다. 깊이는 1.8m로 성인 한명의 몸이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 큰 석조 사이사이로 작은 돌들이 들어가 있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조선 궁궐 내부에서 화장실 유구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경복궁 화장실의 존재는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 ‘북궐도형(北闕圖形)’ ‘궁궐지(宮闕志)’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화장실은 최대 75.5칸이 있었는데, 주로 궁궐의 상주 인원이 많은 지역에 밀집돼 있다. 특히 경회루 남쪽의 궐내각사(闕內各司)와 동궁(東宮) 권역을 비롯해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부지 등에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발굴된 화장실은 동궁 권역 중에서도 남쪽 지역에 위치하며 동궁과 관련된 하급 관리와 궁녀, 궁궐을 지키는 군인이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에 10명, 하루 최대 150명 이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장훈 한국생활악취연구소 소장은 “150여년 전에 정화시설을 갖춘 경복궁의 대형 화장실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동궁 권역의 건물들은 1868년(고종 5년)에 완공돼 20여년 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기 시작한다.

경복궁 동궁 대형화장실 조사 후 전경 (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7.20
경복궁 동궁 대형화장실 조사 후 전경 (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1.7.20

◆경복궁 동궁 권역 어떤 곳?

유구가 발견된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이다. 태조 이성계가 1395년 창건한 궁궐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고,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됐다.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지닌 궁궐’이라는 뜻을 지닌 곳으로,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며 대대손손 태평함을 이어가겠다는 왕조의 소망이 담겼다.

그렇다면 경복궁 동궁 권역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곳은 세자와 세자비가 생활을 하던 공간이다. 이와 관련해서 1994년 세자와 세자비의 거처인 자선당, 세자의 집무 공간이던 비현각이 발굴조사 돼 복원됐다. 특히 이번에 조사가 진행된 동궁 남쪽 지역은 세자의 공부 공간, 세자를 호위하던 군인과 세자의 음식을 만들던 궁녀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광화문 공진회 선전탑(1915년). 이 사진은 조선 왕권이 상실되고 일본 속국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중앙문은 임금의 전용출입문이다. 임금 행차 시에만 통과할 수 있었으며, 평소 신하들은 좌우 문으로 통과했다.이러한 조선왕실의 위엄은 무시한 채 의도적으로 일반인들이 중앙문으로 주로 통과하게 하고 있다. 또 중앙문에 일장기를 걸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 2021.7.20
광화문 공진회 선전탑(1915년). 이 사진은 조선 왕권이 상실되고 일본 속국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중앙문은 임금의 전용출입문이다. 임금 행차 시에만 통과할 수 있었으며, 평소 신하들은 좌우 문으로 통과했다.이러한 조선왕실의 위엄은 무시한 채 의도적으로 일반인들이 중앙문으로 주로 통과하게 하고 있다. 또 중앙문에 일장기를 걸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 2021.7.20

◆일제에 훼손된 궁궐의 가치

이 같은 조선의 역사가 담긴 경복궁은 일제강점기부터 본격적으로 훼파되고 수탈된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지 5년 후인 1915년 9월 11일, 경성에서 조선총독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대대적인 이벤트를 시작한다. 바로 ‘조선물산공진회’였다. 이는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업적 과시, 계몽과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목적의 박람회였다. 50일간 지속된 조선물산공진회로 전국은 떠들썩했고, 입장객 수만 약 120만 명을 돌파했다. 이때 일제는 경복궁을 전시장으로 활용하면서 동궁 영역을 헌다. 원래 근정전 동쪽 부지만 사용하려했으나 조선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까지 확장되면서 근정전을 둘러싼 모든 구역이 공진회 장소로 쓰였다. 이후 일제는 조선의 심장부인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고 여러 건물이 훼손되고 철거됐다.

실제로 임진왜란 후 고종이 중건한 약 500여동에 달하던 경복궁 건물은 해방 직후엔 7개동만 남게 된다. 2010년 기준으로는 전각 125동이 회복된 상태다. 이는 고종이 중건한 건물의 약 25% 수준이다.

이번에 발견된 대형 화장실 유구 사이에는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을 방증하듯 조선물산공진회 기계관 기둥도 발견됐다. ‘공진회회장경복궁지도’를 통해 대략적인 건물 기둥을 살펴볼 수 있다. 향후 대형화장실 유구 연구를 통해 기계관의 규모는 더 정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왕조 500년, 그 역사가 남긴 유구 속에는 일제의 만행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역사, 아직 청산되지 못하고 해결되지 못한 일제의 만행이 하나 둘 세상에 다시금 드러나는 것은, 이제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달라는 과거로부터의 외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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