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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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기곡경(旁岐曲逕)’이란 옛 사자성어가 있다. 방기(旁岐)는 샛길, 곡경(曲逕)은 굽은 길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명저인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군자와 소인을 가려내는 방법을 설명한 글이다.

‘제왕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도학을 싫어하거나,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구태를 묵수하며 망령되게 시도해 복을 구하려 한다면 소인배들이 그 틈을 타 방기곡경으로 갖가지 행태를 자행한다.’

이미 오래전에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한국 공직사회의 혼란한 모습을 얘기해주는 것 같아 공감이 간다.

 

동호문답은 율곡이 한강변 ‘두모포(두뭇개)’에 있던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면서 선조에게 복명한 글이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당시 율곡은 34세의 나이였는데 이미 학문에 일가를 이룬 유학자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두모포의 위치는 지금의 어디쯤일까. 조선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두모포는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의 서울 옥수동 한강변 즉 동호대교 북단 언덕인 것이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의 본류와 중랑천의 물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뒤로는 산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한강물이 호수를 이룬다. 두모포라는 이름은 본래 ‘두뭇개’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폐주 연산도 이곳에 황화정(皇華亭)이란 풍류정자를 지어 가끔 궁에서 나와 여악(女樂)을 즐겼다. 중종 시기부터 임금이 장원급제한 인재들을 선발해 사가독서를 시킨 독서당(獨書堂)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이곳이 동호당(東湖堂)으로 불렸다.

율곡은 이곳에서 약 6개월 동안 공부를 했는데 이 시기에 ‘동호문답’을 지어 선조에게 복명한 것이었다. 동호문답은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는데 꼭 지켜야 할 요목을 문답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논군도(論君道), 논신도(論臣道)를 비롯해 모두 11문답으로 이루어졌다.

 

율곡은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의 등용을 거듭 주장한다.

‘현신들을 등용해 폐법을 혁신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언로를 넓히시어 누구의 말이든지 좋은 말은 항상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 후에 윤리·도덕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우유부단했던 선조는 율곡의 직언을 그래도 수용했다. 훌륭하고 충직한 신하들을 기용해 임진전쟁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했다.

 

옥수동 일원은 얼마 전까지도 속칭 ‘한림말’로 불려왔다.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금도 ‘독서당길’이라 부른다. 그런데도 이곳이 왕명으로 특별히 관리 돼 온 인재양성의 요람, 즉 사가독서를 했던 역사의 현장임을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성동구청이 동호당이 있던 두뭇개 공원에 독서당을 복원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제안을 하고 싶다. 나라 잘되기를 그토록 염원했던 율곡. 임금에게 추상같은 간언을 해 비뚤어지지 않게 직언을 했던 선생의 기개가 그립기만 하다.

동호대교를 건널 때마다 사라진 동호당을 상상해 보는 마음을 지하에 계신 율곡은 아시기나 할까. 선생의 깊은 학문과 우국충정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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