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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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4>

서울의 함락(Fall in Seoul)

한 나라가 개전한 이래로 3일 만에 수도가 함락됐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 전투에서 국군의 방어실책이 침소봉대(針小棒大)가 되면서 당시 군의 용전분투(勇戰奮鬪)가 불명예스럽게 비하(卑下)되고 있는데 국군은 결코 쉽게 수도 서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04시에 38도선에서 일제히 기습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 자체가 당시 국군의 전력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군의 전투력이 산술적인 수치대비로 측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북한군 대비 병력면에서 국군 10만 5752명 대 북한군 19만 8380명으로 약 1대 2의 절대 열세였고, 주요장비 보유수에서도 국군은 전차가 없는 반면에 북한군 242대를 보유했다. 국군은 곡사포 91문에 불과한데 북한군은 SU-76 자주포를 포함한 곡사포가 728문으로 1대 8의 절대 열세였으니 초기 기습을 당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한 것이다.

병력의 전투 경험 면에서도 북한군은 중국 내전에 참전한 동북의용군 3만여명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전선에서 싸운 한인계 소련군 5000여명을 편입시켜서 실전경험을 쌓은 전투원이 무려 1/3이상을 보유한 정예군이었다. 반면에 국군의 정규전 경험 장병은 극소수의 일본군 출신자들뿐이고, 대부분 병력들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비정규전 경험 정도였으니 훈련수준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훈련수준 면에서도 북한군은 소련 측 별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기초적인 전투훈련부터 사단단위 야외기동훈련을 포함한 보·전·포 협동훈련과 대부대 합동훈련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반면에 국군은 북한군이 남파한 공비토벌작전에 장기간 투입돼 계획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할 틈도 없었고, 소부대 전술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현저한 전투력의 차이는 결국 현대 전장사상 최단기간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긴 불명예를 갖게 됐으나, 전사기록을 고찰해본다면 국군의 방어전투는 죽음을 무릅쓰고 처절할 정도로 용감하게 최선의 방어전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정부의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의 함락이 곧 전쟁의 승패이상의 국가흥망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수(死守)를 해서라도 지키고자했었다.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의지를 수용해야했던 국군 지휘부는 전략적인 대응보다는 임기응변적인 전술로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 초기 큰 실책이었다. 결국은 군 지휘부가 전투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우왕좌왕하다가 속수무책 북한군의 초기의 막강한 전력에 서울을 개전 3일 만에 내준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국군은 그 불리한 상황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고자 어떻게 싸웠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의정부가 함락된 1950년 6월 26일 저녁 무렵, 북한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을 통합해 서울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서울북방지역에서의 패전에 당황한 국군은 제2사단과 제5사단 및 수도사단을 투입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대를 투입해도 대전차무기가 없었고, 적보다 우세한 포병도 없었으며, 부대의 훈련수준이나 준비된 진지도 없었기 때문에 ‘파죽지세(破竹之勢)’의 북한군을 저지할 능력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Tip> 수도 서울 함락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능력이 없는 자가 국방장관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리에 앉으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가 가장 책임이 크다고 전사는 평가한다. 그는 1910년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신채호아래서 독립운동을 했다. 1913년 오송상선학교 항해과를 수료 후 중국군 해군소위로 임명돼 중국 해군본부에서 근무했다.

그 후 1923년 독립자금전달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25년 영국으로 건너가 해양대학에서 수학 후 1등 항해사가 됐다. 해방 후 1948년 귀국해 1949년 제2대 내무장관을 거쳐 1949년 3월 21일 제2대 국방장관에 임명돼 6.25전쟁을 맞게 됐다. 그의 경력으로는 군을 통솔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자가 1950년 4월 21일 국무총리 서리까지 겸하게 됐으니 기가 막힌 관운(官運)이다. 육군참모총장에 채병덕 소장을 재임명했고, 내무장관에 천거한 김효석은 훗날 ‘위장된 공산주의자’였다고 중앙정보부에서 파악됐다. 결국 반정부 발언으로 1950년 2월 해임됐으니 그동안 장관자리에 앉아서 수많은 비밀정보를 북한으로 넘겼다고 추정되는 자이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됐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는 허언(虛言)은 유명하다.

그리고 1950년 5월 10일 그의 외신기자회견에서 호언장담한 것은 더 유명한 일화다. “북한이 군사력강화에 힘쓰고 있고, 3만명 모집했으며, 비행기와 탱크도 증강하고 있다. 그리고 38선으로 이동 중에 있다. 우리는 잘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 국군을 신뢰하기 바란다.”고 큰 소리를 쳤으나 결과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만약에 그가 북한군의 동향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관점에서 대비책을 정확히 지시·감독했다면 국군의 초기전투대비태세가 달랐을 것이다.

바로 신성모가 6.25전쟁 초기 전투패배와 서울함락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무능하고 무책임한 자를 중용한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 부산 태종대 산책로에 있는 신성모에 대한 추모조형물과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이 지난 2009년 ‘해기사명예의 전당’에 둔 신성모의 흉상 조형물도 6.25전쟁 초기대비부실책임을 물어서 철거를 검토해야 한다.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4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4

북한군의 기습공격이후로 1950년 6월 25일 14시에 국무회의를 대통령이 주재했고, 채병덕 총참모장의 격퇴할 수 있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믿고 촌각을 다투는 비상상황 하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 정부의 또 하나의 큰 실책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에서는 국민과 시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거짓된 전황을 보도함으로써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방송에서는 “옹진의 제17연대가 해주시를 점령했다(이때 제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해 상륙 중에 있었다)” “국군의 일부는 38선에서 20㎞까지 북진했다”는 등의 무책임한 전황보도를 했다. 여기에 북한공군기가 서울상공에 나타나서 “국군이 북침했기 때문에 보복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에 서울시민들은 혼란을 더 했다. 6.25전쟁의 책임론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론’에 바로 이 허위방송이 이용되는 자충수가 됐다. 더욱이 6월 26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중앙방송을 통해서 “침입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군은 총반격전을 개시했는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해 민족의 숙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라고 생방송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국민들은 이것을 진짜로 믿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신 나간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아닐 수가 없다.

1950년 6월 26일 심야에 소집된 국방수뇌연석회의에서 정부는 ‘결사항전’을 결의했고, 27일 01시 중앙청에서는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돼 정부의 수원 천도(遷都)를 결정했지만 서울시민에 대한 적절한 소개대책 논의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27일 심야에 개최된 비상국회(01시)에서는 ‘수도사수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27일 03시경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그 후 06시에 정부가 수도 천도를 발표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은 비로소 서울의 위기를 알게 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장관으로부터 서울을 떠나야한다는 보고를 받고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라고 했으나 국가원수의 안위(安危)가 곧 국가의 안위라는 설득을 해서 남하를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각료들의 과잉경호로 27일 04시 서울역을 출발해 12시 30분에 대구역에 도착했으나 수원이 아닌 사실을 알고 즉시 돌리라고 지시해 16시 30분에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집무하던 이 대통령은 29일 무초 주한미대사의 승용차로 수원에 올라와 전선시찰을 위해 방한한 맥아더 원수를 영접하고 대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7일 05시에 열렸던 국방수뇌회의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이 전황이 불리하다는 전황을 보고하고 서울포기를 언급했고,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고수를 결심했으나 전방으로부터 27일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27일 06시경 공식적으로 정부의 수원 천도를 발표함으로써 시민들과 국민들이 비로소 정세를 올바로 판단하게 했으나 이때는 너무 늦어서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게 됐다. 그리고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기습효과의 극대화를 달성한 것이었다.

<Tip> 북한군은 서울을 언제 진입했는가?

이 문제는 어느 방어선까지가 서울방어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미아리 삼거리를 지나 길음교를 좌우로 잇는 방어선을 서울의 최후방어선으로 간주할 때 1950년 6월 28일 01시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각에 북한군 전차 2대가 고개를 넘자 미아리 방어선은 무너졌으며, 일제히 한강 이남으로 철수를 했다. 또한 국군은 서울사수를 포기하고 02시30분경 마침내 한강교를 폭파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6월25일 04시 기습공격해 6월28일 01시까지 만 2일 21시간 만에 서울에 진입한 것이다.

창동 방어선 전투

6월 26일 저녁 의정부의 함락으로 후퇴한 국군은 창동일대를 중심으로 도봉산(우의동)-수락산(상계동)선을 연하는 방어선을 형성하고 철수하는 부대를 수습했다. 의정부 남쪽 백석천일대에 배치된 엄호부대인 국군 제2사단 25연대가 밀고 내려오는 적 제3사단 예하 전차 1대를 2.36㏑(인치)로켓포로 격파하고, 이날 밤 제25연대 제11중대 전차특공조가 적 전차 2대를 파괴하는 등 강력히 저지했다. 이런 저항에 적은 공격을 중단하고 퇴각했다가 다음날(6월 27일) 새벽에 공격을 재개했다.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는 제7사단 제1,제3,제9연대와 제2사단 제5,제16,제25연대 및 제3사단 제22연대의 잔여병력을 수습해 총 6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우측방 태능지역 불암산에는 제9연대 철수 병력이,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92고지에는 내촌에서 물러난 생도대대가 배치돼서 결전을 준비했다. 92고지전투는 육사생도 1기와 2기가 육군본부 출동명령에 따라 전투부대로 급편 돼 포천전투에 투입됐다가 26일 18시경 북한군 전차출현으로 진지가 돌파돼 후퇴, 육사 내 92고지 지역에서 방어전투를 치루고 86명의 생도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생도들이 철수를 거부하고 불암산에 은거하며 유격활동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들은 생도1기(10명), 생도2기(3명), 7사단 소속병사(7명)로 구성돼 ‘불암산호랑이’라고 불리며 맹활약을 하다가 1명 외 전원 전사했다.

27일 10시경 각 부대가 창동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40여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공격을 받아 실탄이 고갈 될 때까지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적의 전차가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미아리로 후퇴하게 됐다.

서울시청 앞을 지나는 북한군 T-34전차와 놀라는 서울시민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4
서울시청 앞을 지나는 북한군 T-34전차와 놀라는 서울시민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4

미아리 방어선 전투

6월 27일 10시에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제20연대 제1대대를 171고지 동쪽, 제1연대(대대규모 수준)를 길음교 북쪽 공동묘지, 제15연대 제2대대를 미아리고개 132고지에 배치했다. 그리고 27일 12시에 의정부에서 철수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혼성연대를 164고지 북동쪽, 제8연대 제2대대를 회기동 143고지 및 중랑교 남쪽 106고지에 배치하고 제16연대(대대규모 수준)를 예비로 돈암초교에 배비했다.

이와 같이 27일 오후까지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이 배치됐고,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해 재경 각 부대, 육사생도대대 등 서울 사수를 위한 비장한 각오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서울 사수를 위해 싸웠다. 북한군은 공격기세를 몰아 27일 19시에 폭우 속에서 수유리 방면에서 미아리고개로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는 사력을 다해 분전했으나 적 전차를 저지할 수가 없었지만, 105미리 곡사포 6문과 57㎜ 대전차포 8문의 지원화력을 집중운영해 적 선두전차를 격퇴했다. 그러나 24시경 다시 폭우 속에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기습적으로 북한군 제105탱크사단의 전차들이 진입하면서 국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는 서울방어의 최후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김순 대위(제15연대 제5중대장)가 지휘하는 결사대가 전차에 육탄공격을 감행해 전원 전사했고, 육박전에서도 국군은 분전을 다해 적을 저지했다. 그러나 중과부족으로 북한군에 밀리면서 최초 적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돌파한 시간은 28일 01시경 이었고, 서울의 중심부에 돌입한 것은 10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30분경 이었다. 이렇게 지연이 된 것은 수도경비사령부와 제1공병단의 일부 병력의 죽음을 무릅쓴 시가전이 있었고, 국군 제18연대 1대대와 제5연대 제3대대의 전차특공대가 벌인 육탄공격, 남산으로 집결한 국군장병들로 구성된 일명 ‘백호부대(부대장 이용문 대령)’의 유격전, 동숭동 서울대병원에 침입한 북한군을 저지하다가 1개 경비소대와 입원부상병 80명이 전원 전사하고 학살당하는 비통한 전투가 산발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8일 한밤중이 돼서야 북한은 서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도 서울은 개전 이래 3일 만에 적의 수중에 점령이 됐지만 결코 국군이 쉽게 내어준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적을 저지했으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것은 무모한 저항이었다. 무모한 줄 알면서도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운 장병이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구치소에 구금된 정치범을 물론 죄수들까지 모두 석방했다. 김일성은 28일 서울점령의 축하연설을 했고, 인민위원회를 설치해 이승엽을 임명했다. 북한군은 당초 남침계획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국군 제6사단의 ‘춘천대첩’으로 국군 주력부대 대 포위 기동에 실패했고, 남로당원들의 인민봉기도 없었으며 국군과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초기단계의 차질을 빚었다.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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