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정리 편집부] 한 나라가 개전(開戰)한 이래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이야기다.

초기 전투에서 국군의 방어실책이 침소봉대(針小棒大)가 되면서 당시 군의 용전분투(勇戰奮鬪)가 불명예스럽게 비하됐다. 하지만 국군은 결코 쉽게 수도 서울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04시.

기습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 자체가 당시 국군의 전력으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당시 병력면에서 국군은 10만 5752명, 북한군은 19만 8380명으로 약 1대 2의 절대 열세였다.

국군은 전차가 없는 반면에 북한군은 전차 242대를 보유했다. 국군은 곡사포 91문에 불과한데 북한군은 SU-76 자주포를 포함한 곡사포가 728문으로 1대 8의 절대 열세였다.

병력을 비롯한 전투장비에서 모두 열세한 국군은 개전 초기 긴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했다. 병력의 전투 경험 면에서도 국군은 북한군에 밀렸다.

북한군은 중국 내전에 참전한 동북의용군 3만여명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전선에서 싸운 한인계 소련군 5000여명을 투입해 실전경험을 쌓은 전투원이 무려 1/3이상을 보유한 정예군이었다.

반면 국군의 정규전 경험 장병은 극소수의 일본군 출신자들뿐이고, 대부분 병력들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비정규전 경험 정도여서 훈련수준차이 또한 커 국군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런 조건 가운데 국군 지휘부가 전략적인 대응보다는 임기응변적인 전술로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 초기 큰 실책이었다. 결국 군 지휘부가 전투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에 서울을 3일 만에 내준 것이다.

그럼에도 국군이 수도 서울을 지키고자 어떻게 싸웠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사기록을 고찰해보면 우리 국군이 처절할 정도로 용감하게 최선의 방어전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전 이후 3일간의 전투. T-34 전차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무모한 줄 알면서도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운 국군장병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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