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역사의 한순간이 역사의 기억에 남는 일대의 사건이 될 수 있다.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찾다보면 묻혀 있는 자료에서 지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역사의 기억을 중요시하면서도 여전히 무관심으로 홀대한다. 일제강점기 1910년을 전후로 많은 이들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는 그 시기는 많은 이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당시 열악했던 집안사를 외면하지 못했던 조선 여인들이 나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던 이들은 타 국에서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 시기에 ‘하와이’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장소로 불리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국권을 상실한 조국을 바라보는 이들은 참담했다. 외면할 수 없는 조국의 현실을 마주하며 그들은 자신의 삶에 조국을 담기 시작했고, 조국의 현실을 마주하며 독립자금을 모았다. 하와이 한인 1600여명이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힘을 불어넣고 뜻을 전달한 것도 그 예일 것이다.

1909년 12월부터 1910년 3월까지 총 4개월 동안 하와이에서는 의연금 모금이 진행되었다. 그 명목은 ‘안중근 의사 재 판경비 의연금’이었다. 안중근 의사 재판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하와이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체가 되어 모금에 참여했다. 당시 1600여명이 모은 기금은 $2915.85로 오늘날 가치로는 약 $67,000에 해당되는 큰 액수였다. 기금에 동참한 명단에는 한인 여성의 명단 기록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남편의 성을 사용하거나 본인의 성 옆에 남편의 성을 붙여서 기록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중에서 ‘신명부인회’의 회원으로 명기된 이는 43명, 일반 여성은 2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례에서 당시 하와이에 거주한 한인여성의 애국심과 상호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며 조선여성의 애국심의 잔흔이 의연금 기금명부에 담겼다.

1909년 6월 9일자 ‘신한국보’에서 언급되는 하와이에 정착한 한국여성들은 교회에서 교육을 받거나 기독교 선교활동을 통해서 결속을 다져나간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공식적인 기부에 참여한 명단도 보였는데, 김위레스, 박에스더, 임메리, 조매리, 최마리아 등 기독교와 연관된 이름이거나 김재근 부인, 박경수 부인, 이기영 부인, 김창근 부인, 안치 길 부인 등 한국 풍속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여성 단체로는 신명부인회를 비롯하여 부인교육회, 대한부인회, 대한소녀리그, 대한부인구제회, 영남부인회, 대한인애국부인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구호금, 의연금을 수금하여 국내로 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거주지는 달라도 한마음이었던 조선의 여인들. 하와이 한인여성의 조국독립을 향했던 기록에서 강건한 나라사랑의 체취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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