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고들빼기는 왕고들빼기, 가는잎 고들빼기, 이고들빼기 등이 있는데, 흔한 들풀이지만 쓴나물이라고도 하고 황화채(黃花菜)라고도 한다.

정조 20년(1796) 2월 11일 자 외정리소(外整理所)의 절목에 고들빼기가 고돌박(古乭朴)으로 나온다. - <일성록(日省錄)> -

15세기 말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에는 뱀에 물린 상처에 ‘싀화’의 줄기와 잎을 짓이겨 붙이라는 설명이 있다. 여기에서 ‘싀화’는 ‘고거(苦苣)’라는 한자 명칭에 대한 한글 번역이다. 16세기 초 <훈몽자회>에서는 ‘고거’를 ‘샤라부루(蕒)’, 즉 오늘날의 시화 ‘매(蕒)’를 가리키고 있다. 17세기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서 한자를 차자(借字)한 향명으로 ‘수이화(愁伊禾)’로도 기록하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제물보(㐧物譜)> <물명고(物名攷)> <명물기략(名物紀略)>에서는 ‘고채(苦菜)’라 하였다. <명물기략>에는 “고채는 고도(苦荼)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고독바기가 되었다. 고들빼기의 대궁을 자르면 흰 즙이 나오는데, 이것을 사마귀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떨어진다. 이 흰 즙이 젖과 비슷하여 젖나물이라고 한다”고 명칭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고돌빼기는 ‘고돌박(古乭朴)’ ‘고돌채(苦葖菜)’에서 ‘고돌빼기’ ‘고들이’ 마침내 ‘고들빼기’로 바뀌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 글자보다 먼저이기에 한자가 도입되기 전에도 만백성이 즐겨 먹었던 산야초였던 것이다.

오죽하면 정조 23년(1799) 2월 11일에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정조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 공주 판관 김기응(金箕應)의 첩정(牒呈)에 ‘본주(本州)의 생원 유진목과 유학 임박유의 농서 책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마른 섶으로 모를 덮고 나서 불을 놓으면 강아지풀이나 고들빼기 같은 잡초가 나지 않는다’- <일성록(日省錄)> -고 할 정도였다. 고들빼기는 굳이 식재를 하지 않아도 논밭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잡초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후기, 헌종 시절에 다산 정약용의 차남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시명다식(詩名多識)>과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농정가(農政家), 저술가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부록 ‘山野蔌品(산야속품, 산과 들의 나물)’에 고들빼기가 등장한다.

고들빼기김치는 무엇보다도 겨울을 나기 위한 음식이다. 이는 보통 음력 설 이후에 별미로 먹는다. 김장 때 따로 담가 놓으면 겨우내 입맛 돋우는 김치로 먹을 수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김장 김치가 아직 익지 않았을 때 파김치나 고들빼기김치가 있으면 그 맛이 얼마인가. 듬성듬성 놓아진 콩밥에 된장 시래깃국과 함께 고들빼기김치 한 점을 올려놓아 입이 터져라 우격다짐으로 맛보는 그것이 補(보)요, 藥(약)이다. 고들빼기김치의 발전적인 계승을 위해서는 전통성과 소비자 기호의 적절한 조화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들빼기김치는 쌉쌀하면서도 멸치젓의 감칠맛이 어울려서 밥맛을 돋게 한다. 오죽했으면 전주 사람들은 “고들빼기김치는 양반이 아니면 먹지 못 한다”라고 말한다.

고들빼기는 씀바귀의 일종으로, 늦은 가을에 잎과 줄기가 짙은 녹색이 된 것을 뿌리까지 캐어 김치로 이용한다. 씀바귀는 보통 봄에 많이 나므로 봄에 담그고, 고들빼기는 가을철에 캐어 흙을 털고 씻어 건져서 쌀뜨물과 엷은 소금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양념하여 담그는 겨울철 김장 김치이다.

고들빼기김치는 전라도의 향토 김치로 유명하며, 고들빼기에 쓴맛이 있기 때문에 담글 때 쓴맛을 우려내고 갖은양념과 짙은 젓국에 버무려 담가야 한다. 경상도에서는 속세김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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