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그러나 조약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그리스가 계속 통치했다. 갈리폴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주축인 영국군이 호주와 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을 이끌고 동맹국을 참전한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에 상륙하면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괴크체아다(Gokceada)와 보즈자다(Bozcaada)를 해군기지로 사용했다. 1923년 7월 24일에 조인된 로잔조약에 따라 이 섬은 튀르키예로 반환되었다. 동년 1월 30일,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로잔에서 인구교환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 전후로 일어난 인구이동은 지금까지도 에게해 양안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섬사람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려면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차나칼레는 이러한 이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Guliz Erginsoy 교수는 괴크체아다의 바뎀리(Bademli)마을에서 40~90세인 주민을 인터뷰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삶이 이러한 격변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심층적 자료가 되며,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 해결에 대한 방안을 알려준다.

장소와 건물은 사회인류학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포의 중심이다. 주택은 사회와 개인의 사회적 본성이 유형적, 영구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Erginsoy는 이주로 인해 버려진 주택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했다.

“버려진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이곳에 살았던 가족들과 그들 사이의 족보를 기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장갑, 가방, 기타 개인의 소유물과 그들이 쓴 일기도 발견했다. 문은 열려있었고, 기와와 대들보는 벗겨져 있었다. 무너진 지붕, 산산조각이 난 침대, 매트리스, 직기, 찬장, 의자가 흩어져 있었다. 직기를 땔감으로 삼았으며, 상자를 열고 안에 있던 것들은 누군가 가져갔다. 바닥에는 신발과 수영복도 깔려 있었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조용히 하나씩 기록했다. 내가 본 것을 말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소리 죽여 울었다. 내가 이러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강제 이주는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3~1925년, 타지에서 태어난 50만명의 터키인들이 돌아왔다. 대부분 그리스인들이 떠난 땅에서 살았다. 이 새로운 이민자들 가운데 일부가 차나칼레에 정착했다. 20세기 괴크체아다의 비극은 1970년 보즈자다에서도 재현되었다. 그해에 보즈자다를 떠나야 했던 작가 Dimitri Kakmioglu는 나중에 섬과 섬 주민의 감정을 묘사한 소설을 썼다.

“그리스인을 흠집 내면 터키인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다. 터키인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리스인이 뒤에서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므로 각자 떨어질 수 없다. 여기에서는 북동풍을 포이라즈(Poyraz)라고 부른다. 포이라즈는 어디에도 분다. 당신이 마시는 물과 먹는 음식에도 들어간다. 당신의 피부속으로 들어가 드럼처럼 부풀기도 한다. 나도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인 그 섬의 강력하고 제멋대로인 바람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 그렇게 살았다. 테네도스는 당신의 핏속으로 들어가고, 당신은 바닷바람의 일부가 되었다. 당신은 그렇게 숨을 쉬고, 그 안에서 헤엄쳤다.”

그렇다. 과거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섬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람과 땅이 형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섬사람이 된다는 것은 본토의 모든 편견을 거부하면서 형성된 소속감을 그들끼리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세계와 분리되어 자기의 경계선으로 둘러싸인 자기만의 정체성이다. 머나먼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이어지는 공통의 세계관이 무엇일까? 지정학적 위치는 유리할수록 침탈의 대상으로 변한다. 대륙의 모서리를 차지한 트로이의 비극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에게해에 점처럼 남은 섬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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