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신으로 촉발된 학폭 논란
직장폭력·직장 괴롭힘도 조명
10명 중 1명 “폭언·폭행 경험”
“진료·상담 필요하나 못 받아”
2차 가해 수법 ‘소송 갑질’도
“갑질 규제 제도적 장치 절실”

 직장 내 괴롭힘.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최혜인 기자] #1. 만 6년 넘게 재직하면서 사업주가 아침저녁, 평일 주말 안 가리고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불응하자 ‘투명인간’ 취급을 하더라고요. 화가 나면 “할 줄 아는 게 없는 X끼” 등의 폭언을 하고 종종 제 업무를 배제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정신과 진료를 받았는데 심리검사도 받으려고 합니다.

#2. 사무실 전화가 녹음이 되는데, 상사가 어떤 사람에게 전화해 직원을 이 X끼 저 X끼, XX끼, 연놈 지칭하며 “불구가 돼봐야 정신 차린다. 죽일 거다. 어떤 사람 보니 사람 죽여놓고도 편하게 잘 사는데” 등의 내용이 담겨 있더라고요. 이걸 신고해도 효력이 있는 건가요.

드라마 ‘더 글로리’와 정순신 사태로 학교폭력 논란이 뜨겁다. “제주도에서 온 돼지 X끼” “빨갱이 X끼” “넌 돼지라 냄새가 난다” 등의 언어폭력은 물리적인 신체폭력 이상으로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남긴다. 직장폭력도 마찬가지다. 소개된 사례들처럼 직장인들은 사장이나 상사로부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을 듣고 절망하게 된다.

실제 우리나라 직장인 10명 중 1명(9.4%)은 직장에서 폭행·폭언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직장 내 괴롭힘 경험자 10명 중 4명(41.1%)은 진료나 상담이 필요할 정도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다.

이 조사에서는 1년간 직장 내 괴롭힘 경험 여부에 대해 응답자의 29.1%가 ‘있다’라고 응답해 직장인 10명 중 3명은 회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이들 280명의 직장인에게 의료적 진료·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보니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다’라는 응답이 37.5%, ‘받았다’라는 응답이 3.6%로 나왔다. 괴롭힘 경험자 중 7.1%는 ‘자해 등 극단적 선택을 고민한 적이 있다’라고 응답하기도 했다.

◆제보들 분석… 괴롭힘 중 ‘폭언·폭행’ 31%

#3. 상사와 사소한 의견충돌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제 말이 짜증스럽게 들린다며 상사가 화를 냈습니다. 이어 따라오라는 말에 좁은 탕비실에 들어가자마자 상사는 가까이 다가와 눈을 부릅뜨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욕설·폭언·위협을 하더라고요. 상사의 이런 만행은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모 남자직원은 상사로부터 “돼지 X끼야”라는 소리를 들어왔다네요.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신원이 확인된 제보를 살펴보면 직장 내 괴롭힘이 292건 중 175건(59.9%)으로 가장 많았다. 직장 내 괴롭힘 중 가장 심각한 유형에 속하는 폭행·폭언은 55건으로 31.4%에 달했다. 괴롭힘 유형에는 따돌림·차별·보복이 71건(40.6%)으로 가장 많았으며, 폭언·폭행 다음으로는 임금 68건(23.3%), 징계해고 65건(22.3%), 노동시간 45건(15.4%)이 그 뒤를 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또 제보 중 67건이 회사 또는 노동청에 신고됐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36건에 해당하는 직장인들이 신고를 이유로 불리한 처우 즉 ‘보복 갑질’을 당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 제76조는 ‘신고를 이유로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한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폭력 이상의 고통 주는 ‘보복소송’까지

#4. 회사가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못하게 저를 회유하려다 안 되니 나중에 육아휴직 사용을 거부했습니다. 이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상사가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저를 고소하더라고요. 저도 변호사를 선임해 어렵게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 징계 사유를 나열하면서 해고 처분하겠다고 이것저것 다 넣어 징계 의결신청서까지 작성해놨더라고요.

학교폭력과 직장폭력 모두 노동부에 신고할 수 있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직장 내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학교폭력·직장폭력만큼 고통을 줄 수 있는 2차 가해 수법인 ‘소송 갑질’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형사 소송의 경우 검찰에서 불기소처분이 내려지면 끝나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의 경우 정순신 사례처럼 대법원까지 끌고 갈 수 있는데, 가해자가 피해자를 겁박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또 다른 직원의 신고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 같은 소송을 악용한다는 지적이다. 신고를 이유로 한 무고죄·업무방해죄 고소나 손해배상 청구와 같은 보복소송은 법으로 규율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명예훼손·모욕·업무방해·재물손괴·손해배상 등 ‘소송 갑질’은 흔할 정도로 널렸다. 최소 6개월에서 2~3년간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거리며 소송에 시달린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기는 어려운 일”이라며 “이번 학교폭력 피해자처럼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장들이 ‘감히 나를 신고해’라며 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협박의 도구로 악용하고자 협박·보복소송을 일삼고 있다”며 “무고죄 악용과 부당한 제소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소송 갑질을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정기호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한 피해자에게 형사 고소나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할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며 “법원이 가해자나 사용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제기하는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는 점을 적극 인정하는 등 소송 갑질을 규제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조사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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