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송범석 기자] 어렸을 적 소 몰고 섬진강에 나가 멱감다가 급류에 휩쓸려 그 무섭다는 용소에 빠진 적 있지. 시퍼런 물살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끌고 캄캄한 심연까지 내려갔다간 다시 올라오기를 수십 번, 바닥에 닿으려 발을 굴러봐도 팔을 뻗어 헤엄쳐 나오려 해도 소용돌이는 빙글빙글 내 몸을 안고 어지러이 제자리를 맴돌 뿐 아, 이젠 죽었구나라고 단념했을 때 어디서 야차같이 아귀 센 힘이 나를 낚아 채 물 밖으로 내달아 가는 것이었다

모래밭에 거꾸러진 채 잠시 혼절했다가 먹은 물을 다 토하고 나서 올려다보니 거기 농업학교 다니는 무쇠 팔뚝의 육촌형이 씨익 웃고 서 있었다. 새삼 그 형의 건강한 미소가 그리워지는 이순(耳順)의 아침이다. <이순의 아침>

한 평론가는 이 시를 읽고 눈물이 핑 돌았단다. ‘야차 같이 아귀 센 힘’을 지닌 ‘무쇠 팔뚝의 육촌형’이 죽었다 살아난 동생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씨익 웃는 그 건장한 미소가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나이를 추억과 연관 지어 드러낸 이 작품에는 따스한 시선이 깃들어 있다. 시 곳곳에는 환갑을 넘긴 시인의 추억이 담뿍 담겨 있다. 그런가하면 다른 시에는 몽상의 세월을 보냈던 자책의 목소리와 가벼운 세태에 대한 비웃음이 실렸다. 삶의 자의식을 숨김없이 풀어내는 시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이시영 시집 / 창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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