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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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을까? 그것도 폭군 연산군 시절에. 그런 강직한 관리가 있다. 중종 때 청백리에 두 번이나 뽑힌 박상(1474∽1530)이다.

전라도 나주에 소부리(牛夫理)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애첩 숙화(淑華)의 아비였다. 그는 토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권력을 감히 손보지 못했다.

1506년 5월 12일의 ‘연산군일기’에는 소부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교하였다. ‘숙화의 아비 김소부리가 나주로 내려갈 때 말을 지급하라.’ 소부리는 나주의 종으로 숙화가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함을 믿고 교만방자하므로, 온 전라도가 그를 맞이하고 전송하며 지공접대(支供接待)하기에 분주하고 겨를이 없어,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처럼 하였으며, 소부리는 수령과 대좌하여 술잔을 주고받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소부리의 패악 소식을 들은 전라도사 박상은 1506년 8월에 나주 금성관에서 소부리를 심문했다. 그는 1505년부터 전라도사로 전주 감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소부리가 자기 죄를 자복하지 않자, 박상은 곤장을 치라고 명했다. 그런데 곤장을 심하게 때린 탓에 소부리가 죽고 말았다.

박상은 화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상을 체포하기 위해 내려오던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렸다. 박상이 정읍을 지나 10리쯤 가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샛길로 들어갔다. 박상이 고양이를 따라가 서울로 올라가니 세상이 바뀌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박상은 담양부사 시절에 청백리로 뽑혔다.

1515년 2월 16일 자 ‘중종실록’이다.

“전교하였다. 청백탁이(淸白卓異)한 담양부사 박상·여산군수 송흠에게 향표리(鄕表裏)를 하사하라.”

그런데 1515년 8월에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신비복위소’를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의 딸인데, 신수근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박원종 등에게 죽임을 당했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까 봐 신씨를 7일 만에 폐위시켰다.

1515년 3월에 장경왕후 윤비가 인종을 낳은 후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이후 기괴한 일이 계속 발생하자 중종은 구언교를 내렸다. 이에 박상 등은 신비를 복위하라고 소를 올린 것이다.

이 상소로 조정은 논쟁에 휩싸였다. 사간들이 처벌하라고 하자, 중종은 박상을 전라도 남평으로, 김정을 보은으로 귀양 보냈다. 이러자 조광조가 나섰다. 구언 상소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상과 김정은 곧 풀려났다.

1519년 11월 17일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화순군 능주면으로 귀양 간 조광조(1482∽1519)는 12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1520년 봄에 조광조 시신은 고향인 용인으로 떠나갔다. 박상은 관이 실린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보면서 만시(挽詩)를 지었다.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한편 박상은 1524년 충주목사 시절에도 청백리로 뽑혔다. 또한 기묘사화로 충주에 은거한 이자와 함께 김시습의 ‘매월당집’을 편찬했다.

박상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서창동 절골마을에 있다. 재실 문 이름은 완절문(完節門)이다. 박상, 그는 강개와 의리의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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