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천지일보 2022.6.10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천지일보 2022.6.10

[지역명소] 3.1운동 순국기념관 

1919년 일어난 참혹한 사건
화성에서도 만세 소리 울려
일제, 검거·학살 등 만행
일제, 아리타 중위 무죄 판결
선교사·통신원 폭로로 알려져
일본 기독교인들 사죄하기도
초·중·고 학교연계 교육 진행

[천지일보 화성=김정자 기자] #1. 아리타 중위가 나가자 뭐라고 세 번 날카로운 구령이 들려왔고 입구에 있던 병사들이 교회당 안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교회당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오르고 쓰러지고 하는 아수라장을 이뤘다. (생존자 노경태씨)

#2. 밤중쯤 되니께 좌판이 하구 일본 사람 댓 데리구 들어오더니 이렇게 나와 죽을 사람을 죄 창으로 찔러서 그렇게 해유. 죽은 사람을 죽은 거를 거 무슨 죄로 창으로 찔러서 창자가 흐르게 해유. (생존자 전동례씨)

#3. 토막토막 난도질한 후 불을 놓아 시체를 구별할 수 없게끔 만들었어.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면 현기증이나. (생존자 김시열씨)

화성 4.15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이 어느덧 103주년을 맞았다.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군 육군 헌병 중위인 아리타 도시오의 주도로 발생한 학살 사건이다.

천지일보는 최근 제암리 사건 당시의 생생함을 볼 수 있는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을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제암리교회에서 학살당한 순국선열의 시신은  당시 가마니에 담겨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는데 1982년 유족의 증언에 따라 유해를 발굴해 이곳으로 옮겨 합장묘소를 마련한 것 ⓒ천지일보 2022.6.10
제암리교회에서 학살당한 순국선열의 시신은 당시 가마니에 담겨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는데 1982년 유족의 증언에 따라 유해를 발굴해 이곳으로 옮겨 마련한 합장묘소. ⓒ천지일보 2022.6.10

◆화성에서 일어난 끔찍한 학살 사건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시작된 3.1운동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해 화성지역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탄면을 시작으로 전개된 만세운동.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인 1919년 3월 28일과 31일 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횃불 시위를 했다. 4월 3일에는 우정면 쌍봉산에 올라가 시위했다. 하지만 일제는 전라도, 충청도에서 만세운동을 못 하게 화성시 향남면 발안리를 차단했고 1919년 3월 31일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편성해 검거 활동을 시작했다.

큰 검거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6일 새벽 수촌리 마을을 포위하고 42가구 중 38가구에 불을 지른다. 그로 인해 수촌교회가 불타버린다. 4월 15일에는 아리타 중위와 보병 11명이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1919년 3월 28일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있는 화성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또 1000여명의 주민들은 면사무소 부근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가 나와 해산 명령을 요구했다. 만세를 부르던 홍면옥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것은 당연하기에 내가 거리로 나왔다”며 계속 만세 시위를 했다. 그러던 중 총상을 입어 시위주도자인 홍면옥은 부상을 당했다. 같이 모여있던 군중들은 겁내기는커녕 일본군과 맞섰다. 당시에는 농기구와 소나무 몽둥이, 돌을 무기로 사용했으며, 시위대는 무기를 들고 노구치 순사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화성시 향남면 발안리에서 열린 오일장에서는 일본인들이 무력으로 진압해 다수가 다치고 체포당하는 등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화성 발안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제암리·고주리 사람들이 많았다.

화성 평리에는 일본 자녀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하면서 주민들이 일본인 가옥과 학교 등을 파손하고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지역 내 일본인들은 청북 지역으로 피신하게 됐다.

이후 화성지역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만세 시위를 이어나갔다. 1919년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계획적인 연합 시위를 하며 장안·우정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5일 수촌리를 급습해 민가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후 시위 주모자를 2차례에 걸쳐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했다.

1919년 4월 13일 일본군 중위인 아리타 도시오가 지휘하는 보병부대가 발안에 도착했다. 아리타 도시오는 1919년 4월 15일 만세 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유인해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의 성인 남자들을 제암교회에 모이게 했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모이게 한 후 총격과 함께 교회에 불을 질렀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총으로 쏴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했다.

이후 일본군은 제암리 마을 민가에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인근 마을 고주리로 가서 독립운동가 김홍열 가족 6명을 참살하고 불태웠다.

일본에서 발행한ㄴ 1991년 7월 15일자 교토신문.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방문한 안용웅과 안형헌(전동례의 손자)이 당시 일본군ㄴ에게 길을 안내한 사사카의 아들(당시 81세)을 만난 내용이 실려있다. ⓒ천지일보 2022.6.10
일본에서 발행한 1991년 7월 15일자 교토신문.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방문한 안용웅과 안형헌(전동례의 손자)이 당시 일본군에게 길을 안내한 사사카의 아들(당시 81세)을 만난 내용이 실려있다. ⓒ천지일보 2022.6.10

◆사건 발생 후 뒤늦게 알려진 역사

제암리 학살 사건 다음 날인 1919년 4월 16일 미국 부영사 레이먼드 커티스와 호레이스 언더우드(H.H.Underwood) 선교사, AP통신 서울 통신원인 테일러(A.W.Taylor)가 제암리를 방문했다. 커티스는 언더우드의 진술서와 사진을 버그홀즈에 보고했다. 같은달 18일에는 스코필드 선교사가, 19일에는 테일러와 영국 대리영사 로이즈, 노블 선교사, 케이블 선교사 등이 제암리를 찾았다. 이들이 현장 확인을 위해 제암리를 방문하면서 제암리 학살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 해외 여론이 점차 악화되자 일제는 학살의 주범인 아리타 도시오 중위를 군법회의에 넘겨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다. 일제는 아리타 중위가 저지른 학살 행위가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제암리 학살 사건은 언급조차 없었다. 대한민국이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한국전쟁까지 끝난 이후인 1959년이 돼서야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1969년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리 교회당을 재건해 1970년 9월 22일에 완공됐는데, 이곳이 현재의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암교회다. 이 교회당은 2002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다.

스코필드 교수는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한 후에도 한국인들을 돕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지만, 1968년 건국 공로 훈장을 받았고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도쿄대학교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교 학장으로 재직했던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는 일본 군인이 저지른 잔인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를 담은 ‘어떤 살육사건’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제암29선열유족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고(故) 안용웅씨는 199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소하는 등 일본의 책임 있는 반성을 촉구했다. 같은 해 7월 15일 발행한 교토신문에는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안용웅씨와 전동례씨의 손자인 안형헌씨에 대한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기억탑 ⓒ천지일보 2022.6.10
기억탑. ⓒ천지일보 2022.6.10

◆추모·교육 등을 통해 역사 체감

제암리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63년 만인 1982년 9월에 도이리로 옮겨졌던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이 진행됐고, 동전·철사 고리·단추·병 조각·못 등이 출토됐다.

현재의 3.1운동 순국 기념탑 자리는 제암교회가 불탔던 제암리 학살 현장으로 1982년 사적 제299호로 지정됐다. 1984년 일본에 희생된 29명(제암리 23명, 고주리 6명)을 기리기 위한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세워졌다.

2001년부터는 제암리, 고주리 학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건립됐다. 매년 4월 15일 화성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제암·고주리에서 희생당한 29인의 선열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암·고주리 29인의 동행’이란 주제로 추모제를 열고 있다.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서는 지난 4월부터 화성 독립운동사 및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을 주제로 초·중·고등학교 학교연계 교육을 진행한다.

현장 교육, 찾아가는 교육, 온라인 교육 세 가지 방향으로 초등 교과 연계 교육은 제암리에서 듣는 3.1운동 이야기, 3.1만세길로 떠나는 시간 탐험Ⅰ·Ⅱ를 진행한다. 중·고등 교과 연계 교육으로 AR 속 숨겨진 화성 3.1만세길, 전시물로 살펴보는 화성 3.1운동이야기, 총 5종을 실시한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와 내용으로 구성된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학교연계 교육은 화성 3.1운동의 위상과 역사 공공성 강화를 위해 많은 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 방법 및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한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매주 월요일, 매년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에는 휴관한다. 수원역이나 병점역에서 버스로 약 1시간 정도 가면 순국기념관이 있다. 화성시에서 일어난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 방문하는 걸 추천해 본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천지일보 2022.6.10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천지일보 202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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