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

고운기(1961 ~  )

이른 새벽
눈길을 걸어 동구(洞口)를 벗어난 자의 정체는
누구나 알았다.
발길이 어디로 가서 멈췄는지
모를 뿐이다.

거칠게 끌린 발자국을 보아라.
서둘러 잰 걸음에
닮아서
식솔(食率)의 어느 얼굴을 지우려 힘겨웠는지
찍혀 있다.
 

 

[시평]

‘세화’는 제주도에 있는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화’는 마치 밤새 내려 쌓인 눈 위로 찍힌 발자국이 무슨 꽃 모양을 띠고 있는 듯한, 그러한 이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의 입속에서 예쁜 이름으로 옹알이며 불릴 수 있는 그런 단어, ‘세화’. 그와 같은 의미에서 언어를 다루는 것을 천성(天性)으로 아는 시인은,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제주도 어느 지역의 이름인 ‘세화’를 시의 제목으로 삼았으리라.

미지의 이름 세화에도 눈이 내려 온 마을을 하얗게 덮었다. 눈이 하얗게 덮인 이른 아침, 그 눈을 밟으며 누군가 발자국을 남겨놓고 동구 밖을 향해 나갔다. 그 발자국이 어디에서 멈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발자국이 누구인 줄은 그 누구도 안다. 눈 위에 거칠게 찍힌 발자국.

그렇다. 세상살이란 모두 눈 위에 찍힌 발자국 마냥, ‘바쁘고 잰’ 그래서 거친 발걸음들 아니겠는가.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밟고 지나야 하는 세상을 덮은 하얗고 하얀 눈. 미지의 이름 ‘세화’에도 눈은 내려 하얗게 뒤덮였고, 세상의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그 눈을 바쁘고 잰 걸음으로 거칠게 밟으며, 동구를 지나 세상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건사해야 할 식솔들의 그 얼굴, 얼굴을 하나하나 마음속 깊이 떠올리며.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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