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와당연구가

발해는 개국 10여 년 만에 고구려 패망의 상흔을 씻고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발굴된 수도 상경(上京) 위상은 이런 급속한 발전을 증명하고 있다. 왕경은 당의 장안성과 비슷하게 장엄하게 건설됐다. 본성은 외성으로 둘렀고 국왕이 거주하는 궁성은 또 내성을 축조해 이중으로 방어하도록 했다.

궁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는 일직선의 넓은 주작대로(朱雀大路)를 냈다. 한나라 장안성을 모방해 만든 왕경은 화려했을 것이다. 궁성 안에는 정연하고 아름다운 전각을 건축했으며 지붕은 장엄하게 적색기와로 덮었다. 바다 건너 일본국에 보낸 교서에 새 국명을 쓰지 않고 고구려 국호를 그대로 적어 보낸 것을 보면 고국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문화 예술 면에서도 역동성을 그대로 이었다. 와당에 나타난 무늬를 보면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중국 단둥 발해 유적지에서 출토된 와당이 고구려 와당으로 평가돼 한동안 유통되기도 했다.

발해 인동와당 (제공: 이재준 와당연구가) ⓒ천지일보 2021.10.4
발해 인동와당 (제공: 이재준 와당연구가) ⓒ천지일보 2021.10.4

여기 소개하는 와당은 전형적인 발해와당으로 인동(忍冬) 당초문양을 기초로 한 것이다. 가운데는 구형(球形)의 돌기문으로 자방을 삼고, 2조의 가는 동심원을 돌렸다. 외구에는 3개의 단판 연화문과 그 사이로 인동 당초문을 배치했다. 연판은 한가운데 1조의 선문으로 구획했으며 끝은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연판 사이에는 3개의 간판을 정연하게 배치했는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고구려 특유의 인동 무늬다. 3개의 인동무늬는 바깥 동심원과 맞닿아 있다. 양팔을 벌린 고구려인들이 씩씩하게 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켜준다. 주연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소문대로서 고구려 와당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출토지는 전 발해유적지라고만 알려졌으며 적색으로 모래가 적은 경질이다. 크기는 경 15.2㎝, 두께 4㎝.

※ 고구려 와전의 신비는 이번 50회로써 끝을 맺습니다. 필자이신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 고문께 감사드리며 관심을 가져주신 애독자 여러분에게도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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