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김문기(1399~1456) 선생을 사육신으로 현창했다. 사진은 김문기 선생의 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사육신 현창 김문기 선생 노량영당제향 봉행

[천지일보=이길상 기자] 김녕(金寧)김씨충의공파대종회는 8일 서울시 동작구에 위치한 대종회 회관 층에서 ‘노량영당제향’을 봉행했다. 노량영당(鷺梁影堂)은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김문기(1399~1456) 선생을 현창한 후 선생의 영정을 모셔 놓은 사당을 말한다.

▲ 김진국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이날 제향에는 김진국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장을 비롯해 초헌관 박규을 한국유림총연합회 전 총재, 아헌관 김진현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 이사장, 종헌관 조재길 사육신현창회 이사 등을 비롯해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 관계자 70여 명이 참석해 김문기 선생 애국충절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김문기 선생은 1399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그 동네 이름이 효자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선생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면서 활달했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본관은 ‘김녕’이고 호는 백촌(白村)이며 시호는 충의(忠毅)다. 1426년(세종 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으며 그 후 예문관검열‧정언‧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김문기 선생은 언변에 능통했고 강직 청렴해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문무겸전(文武兼全)한 국방전문가였으며 백발백중의 명궁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의하면 김문기 선생은 단종복위 모의사건으로 국문(鞠問)을 당할 때 불복(不服, 대답하지 않는 것)했다. 그는 1456년 음력 6월 8일 일주일 동안 행해진 국문 끝에 수레로 사지가 찢기는 환형을 당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국사편찬위원회 회의록을 토대로 (사)백촌한국학연구원에서 만든 ‘백촌 김문기 선생 사육신 현창 자료’에는 김문기 선생이 박팽년‧성삼문 등과 단종복위를 논의할 때 두 사람에게 역할분담을 정해 줬다. 자신은 거사의 성패를 가름할 군을 동원했다. 이를 보더라도 그가 단종복위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김문기 선생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김녕 김씨 문중은 1977년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에 해당된다고 관련 기관에 탄원했다.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 선생을 세조 때 가려진 사육신으로 판정하고 현창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서울시는 1978년 5월 18일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 선생의 묘를 설치하고 의절사에 위패를 봉안해 지금까지 현창해 오고 있다.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에게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복위를 주장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에서 현창된 김문기를 말한다.

조종업 (사)백촌한국학연구원 이사장은 “김문기 선생은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그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말했다.

김진국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장은 “백촌 선조는 우리 후손 모두가 영원히 존중해야 할 충절의 표본”이라며 “오늘 단종복위를 위해 순의(殉義)하신 555주년 제향을 맞아 우리 모두 선조의 거룩한 절의(節義)정신을 가슴 깊이 되새기고, 자랑스러운 후손답게 올곧은 행신(行身)으로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오늘날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충효교육이 더욱 절실하다”면서 “사육신의 거룩한 충절을 이어받는 청소년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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