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왕중양(王重陽)은 송휘종 정화(政和)2년(1112), 함양에서 태어나 금대에 성장한 지식인으로, 본명은 중부(中孚), 자가 윤경(允卿)이다. 과거에 실패하자 문과를 포기하고 무술을 수련해 금희종 천권(天眷)원년(1138)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름을 세웅(世雄), 자를 덕위(德威)로 바꾸어 출세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하자 도교에 입문해 이름을 왕철(王喆), 자를 지명(知明), 호를 중양(重陽)으로 고쳤다. 어느 날 왕중양은 갑자기 탄식했다.

“공자는 사십불혹(四十不惑), 맹자는 사십부동심(四十不動心)이라 했는데 지금 내 나이는 이미 48세가 아닌가? 보잘 것 없이 무위도식하고 있으니 벌레와 같지 않은가?”

이후로 왕중양은 점차 멋대로 행동하며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다. 친척들은 해풍(害風)이라 불렀지만 자신은 해풍(海風)이라고 떠들었다. 왕중양은 봉두난발을 하고, 털담요를 두른 두 사람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유명한 신선 여동빈(呂洞賓)이다. 다음해 중추절, 왕중양은 예천에서 우연히 여동빈을 만났다. 여동빈은 왕중양에게 동해에서 수행하라고 말했다. 

왕중양은 처자식을 버리고 미치광이처럼 떠돌며 종남산으로 갔다. 얼마 후에 귀향한 그는 작은 암자를 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며 활사인묘(活死人墓)라고 불렀다. 구덩이 앞에 왕해풍영위(王害風靈位)라는 위패를 세웠으며, 해당화 한 그루씩도 심었다. 함께 있던 화공(和公)이 까닭을 묻자 해당화처럼 사방을 교화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3년 후, 왕중양은 호로병과 표주박을 들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마셨다. 어느 날 감하(甘河)에서 술을 사오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더니 술을 달라고 했다. 단숨에 술을 마신 그는 옆의 시냇물을 떠와서 마시라고 했다. 시냇물은 신선주로 변해있었다. 그가 왕중양에게 유해섬(劉海蟾)을 아느냐고 물었다. 왕중양이 그림에서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큰소리로 웃으며 사라졌다. 이후로 왕중양은 술을 마시지 않고 맑은 물만 마시고도 대취했다. 어느 날 밤, 왕중양은 자신이 머물던 암자에 불을 질렀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달려와 불을 끄느라고 야단이었지만, 왕중양은 오히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불을 지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3년 후에 누군가가 이 암자를 수리할 것이다.”

왕중양은 도반들에게 이별시를 남기고 걸식을 하면서 산동의 등주(登州)로 갔다. 금세종 대정(大定)7년(1167), 왕중양은 영해(寧海)에서 유생 범명숙(範明淑)을 만났다. 범명숙은 마의보(馬宜甫)의 식객이었다. 마의보는 꿈속에서 선학 한 마리가 정원의 남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마의보의 부인이 나중에 팔선이 된 손불이(孫不二)이다. 마의보와 왕중양은 꿈속에서 선학이 날아오른 곳에 전진암(全眞庵)을 지었다. 전진교의 시작이다. 이도순(李道純)은 전진활법에서 전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본래의 진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정(精), 기(氣), 신(神)이 온전한 상태를 본진이라 한다. 정을 보전하려면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기를 보전하려면 마음이 청정해야 한다. 신을 보전하면 허로 돌아갈 수 있다.”

전진교에서 말한 안정(安靜), 청정(淸靜), 의성(意誠)이 무욕무념(無慾無念)과 한적안정(閑寂安靜)이다. 이러한 교리는 불교와 유교의 교리를 도교화한 것이다. 전진교는 중국을 점령한 여진과 몽고 정권의 폭력성을 완화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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