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우파의 5.10 선거 수호 활동. 이승만, 독립촉성국민회, 한민당, 대동청년당 등 우파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미군정과 유엔위원단의 선거 진행을 지원했다. ⓒ천지일보 2018.10.10
우파의 5.10 선거 수호 활동. 이승만, 독립촉성국민회, 한민당, 대동청년당 등 우파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미군정과 유엔위원단의 선거 진행을 지원했다. ⓒ천지일보 2018.10.10

헌법이란 그 나라 국가와 국민이 함께 추구할 가치와 사회 운영 원칙을 담은 국가의 최고법이다. 지난 7월은 대한민국 입헌민주정치 70주년 기념의 달이었다.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았다. 이전의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제병합으로 35년 전에 사라졌다. 3.1운동 이후 중국 땅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해방의 순간까지 있었으나, 막상 해방이 되자 건국의 주체로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미국 소련 등이 승인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국가권력 공백 상태에서 일제는 패망했고,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으로 나누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진주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미국과 소련은 연합국으로서 독일, 일본에 대해 함께 싸웠으나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소련은 자국이 점령한 동유럽 국가를 병합시키거나 위성국가로 삼아 공산권을 형성했다. 미국과 서유럽 민주국가들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봉쇄정책을 폈다.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를 발표했다. 그중에는 ①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임시정부 건설 ②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의 최대 5년간 신탁통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여론이 발칵 뒤집어졌다.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은 제2의 독립운동을 선포하고 총동원령을 내려 전면적인 반대(반탁)운동에 돌입했다. 좌익도 반탁운동에 함께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스크바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였다. 남한의 조선공산당 총책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모스크바의 뜻은 ‘찬탁’이었다. 북한은 공산당 단일 세력이고, 남한의 좌익 세력을 합하면 남한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만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와 좌익의 방향을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렸다. 우익은 좌익의 찬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해산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투표광경 ⓒ천지일보 2018.10.10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투표광경 ⓒ천지일보 2018.10.10

남한만의 단독선거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수립을 위해 유엔 감시 아래 남북총선거를 의결하였다. 그러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이 유엔 결의안을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총선거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치러지게 되었다.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 성명을 내고, 김규식·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1948년 4월 19일부터 2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북한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기대하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는 김일성이 남한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소집한 집회였으므로, 김구 등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야 했다. 더구나 “김구 주석이 임시정부의 옥쇄를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식으로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만 당했다.

남한의 총선거는 당초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해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방침이었으나, 북한지역 할당 100석을 유보해 두고, 남한에서 200석의 의원을 뽑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날, 선거인 명부 등록자 95.5%가 투표에 참가하였다. 상상할 수 없는 높은 투표율은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들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었다.

총선에는 948인이 입후보하였는데,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5인의 후보자를 내었고, 군소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여 10인 이내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43개, 1인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26개였으며, 전체의 44%인 417인이 무소속이었다.

선거결과 무소속 85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인, 한국민주당 28인, 대동청년당 12인, 조선민족청년당 6인,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인, 기타 11개 정당·단체에서 각 1인이 당선되었다.

그해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헌법 제정과 국정 책임자를 뽑는 2년 임기(1950년 5월 30일까지)의 특별 국회였다. 의원 중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을 맡은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목사이기도 한 이윤영 의원에게 개원기도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회는 기도로 시작하게 되었다. 의원 일동이 모두 일어서고 이윤영 의원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 광경(1948. 5. 31) ⓒ천지일보 2018.10.10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 광경(1948. 5. 31) ⓒ천지일보 2018.10.10

개원기도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선림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중략)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이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심원하야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중략)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야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이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야 주 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협상하러 북한으로 가려는 김구의 북한행을 만류하기 위해 김구의 거처 경교장에 모여든 학생들(1948. 4. 19) ⓒ천지일보 2018.10.10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협상하러 북한으로 가려는 김구의 북한행을 만류하기 위해 김구의 거처 경교장에 모여든 학생들(1948. 4. 19) ⓒ천지일보 2018.10.10

국회의장단 선출과 헌법제정

이어 의원들의 투표로 국회의장단을 선출했다. 의장에는 출석 198명 중 188표를 얻은 이승만이, 부의장에는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6월 2일 제3차 본회의에서 30명의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였고, 다음날 전문위원으로 유진오, 노진설, 고병국 등 10명을 위촉하였다.

6월 4일부터 중앙청 홀에서 열린 기초위원회는 유진오 전문위원이 입안한 내각책임제, 양원제, 3권분립을 내용으로 하는 안을 기초로 하고, 법전편찬위원회(위원장 김병로)가 작성하여 제출한 헌법초안, 임시정부헌장, 민주의원에서 제정한 임시헌장, 입법 약헌 등과 구미 각국의 헌법을 참고안으로 하여 기초에 착수했다. 국호는 초안에서는 한국으로 되어 있었는데, 대한, 고려, 조선의 3안이 나와 격론을 벌이다가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국회는 단원제,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로 갈라져 격론을 벌여 내각책임제로 기울어졌는데 미국애서 오래 활동한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를 역설하여 결국 대통령중심제로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전문과 10장 103조로 구성된 헌법이 완성되었다. 헌법 전문에는 헌법의 제정 이유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았다.
 

신탁통치 반대 시위운동 광경 ⓒ천지일보 2018.10.10
신탁통치 반대 시위운동 광경 ⓒ천지일보 2018.10.10

제헌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헌법초안은 6월 23일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7월 12일 국회를 통과하여 7월 17일 공포되었다. 7월 20일 헌법에 정한 절차에 따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해 정부통령을 선출했다. 대통령에는 196명 중 180표를 얻은 이승만이,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선출되어 7월 24일 취임하고, 8월 15일에는 옛 중앙청 앞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거행했다. 그해 9월 13일 미군정은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에 행정권을 이양하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