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김개남(1853~1895)은 1890년경 동학을 믿기 시작해 1891년에는 동학의 지역 책임자인 접주가 됐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10
185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김개남(1853~1895)은 1890년경 동학을 믿기 시작해 1891년에는 동학의 지역 책임자인 접주가 됐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10

김개남

185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김개남(1853~1895)은 1890년경 동학을 믿기 시작해 1891년에는 동학의 지역 책임자인 접주가 됐으며, 1893년 보은 집회 후에는 대접주가 됐다.

전봉주, 손화중과 함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을 이끈 지도자로 조선 조정이 전주화약(全州和約: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조약)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 봉기했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농민군 지도자로서 양반 지배층을 응징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한양으로 호송되지도 않은 채 1895년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사진은 김개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정성길(대구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공개한 뒤 알려지게 된 사진이다. 사진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원본의 소장자는 정성길 관장이다.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정치가인 서광범(1859~1897)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10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정치가인 서광범(1859~1897)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10

서광범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정치가인 서광범(1859~1897)은 1879년경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9월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883년 3월 귀국했다. 이어 6월에는 보빙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미국의 주요도시 시설을 시찰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1884년 6월 귀국했다.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와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884년 12월 개화당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 이후 1885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간 후 1894년 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외무성의 주선으로 귀국했다. 그해 12월 17일 수립된 제2차 김홍집내각의 법무대신으로 임용됐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무너지자 친러시아파 정권에 의해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공사직에서 해임됐다. 이후 지병이었던 폐병이 악화돼 미국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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