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금슬(琴瑟)이란 "부부간 사이가 좋다"는 뜻으로 쓰여지는 단어다. 거문고를 가락에 맞추어 켜듯 아내와 잘 화합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관저 편에는 '요조한 숙녀를 금슬로서 벗한다'고 나와 있다. 조용하고 얌전한 처녀를 맞아 거문고를 치며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부부가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금슬상화(琴瑟相和)’란 문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남편이 노래 부르면 아내가 따라 부른다는 ‘부창부수(夫唱婦隨)’란 사자성어도 부부사이의 화합을 담은 옛 말이 아닌가.

조선 중종 때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공부벌레라는 별명을 가졌던 분이다. 시인이었던 아내 송씨와 몇 년을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이 부부의 일화는 선비 사이에서 오래 회자 돼 왔다.

조선시대 관리는 부임지에 아내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다. 미암은 관아에서 많은 관기들을 희롱할 수 있었지만 아름다운 아내 송씨를 생각하여 절제했다. 어느 해 6개월 동안 관기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자랑삼듯 편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그러나 아내는 믿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남편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미암은 부인의 책망을 듣고 얼굴이 무색했지만 아내를 달래는 편지를 또 보낸다.

왜 미암이 이처럼 먼 객지에서도 아내를 그리는 정이 다른 사람보다 강했을까. 그것은 자식들을 가르치고 시부모를 모시는 부덕이 남다르고 뛰어난 글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씨는 덕봉(德峰)이라는 호를 가진 시인이기도 했다.

아내의 서신을 받아든 남편은 아내의 편지에 감동을 받는다. ‘미암에게 준다’는 뜻의 ‘증미암(贈眉巖)’이란 시는 남편의 객지생황에서 다른 마음을 갖지 못하게 했다.

미암은 자기 마누라를 칭찬하면 팔불출이라는 희롱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내 부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좋아했다.

중종 때 대제학 김정(金淨)과 아내 송씨의 부부애는 하늘이 감동할 눈물겨운 스토리다. 남편이 제주도에 귀양을 가 사약을 받자 젊은 아내는 남장을 하고 제주도로 간다. 그리고 남편의 시신을 지게에 짊어지고 대덕(지금의 대전시 내탑동)으로 오는 것이다. 당시 대덕에서 제주도는 보름 이상이나 걸리는 먼 길이어서 시체는 썩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게다. 아내는 매일 밤 남편의 시신을 눈물로 닦아주며 못다 한 아내의 정성과 사랑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전라도 진안에 삼의당(三宜堂) 김씨라는 여인이 살았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가난한 선비인 하립의 아내로 온갖 고생을 하며 내조했다. 남편을 과거에 급제시키기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지아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그녀는 삼의당이라는 필명으로 260여편의 주옥같은 한시와 산문을 남겼다.

경기도 평택 귀래리에서 에이스케미컬을 경영하는 김태흥 대표의 얘기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김 대표는 기계음이 시끄러운 공장 내부를 아내의 시화(詩畵)로 가득 채우고 온갖 화분으로 화원을 만들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시화를 나란히 걸기도 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인(仁)’경영을 통해 행복한 삶의 터전을 조성했다. 불황이 심각한 요즈음 직원 35명이 연간 150억원의 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이 회사는 ‘세계적인 3M기업과 경쟁하며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이상을 설정하고 있다.

시인부부의 ‘금슬상화’와 행복지수가 높은 직원들의 창의적인 노력이 쌓은 성공 탑이어서 감동을 준다. 우리 사회에 이런 아름다운 기업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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