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은 기존의 임명에서 면허를 인가받는 것으로 변화되었는데 그러한 사례를 박승석(朴勝錫)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근거하여 1913년 3월 8일부로 박승석이 종두인허원으로 등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 시대(大韓帝國時代)에 종두의양성소(種痘醫養成所)에서 과정을 이수하면 취득할 수 있었던 종두인허원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와서는 조선총독부의 감독(監督)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일제강점기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의 구체적인 현황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1923년 당시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이 1581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의사(醫師)가 1207명인 것으로 볼 때 종두인허원 인원(人員)이 의사보다 많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았던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의 흔적을 현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박승석(朴勝錫)의 행적(行蹟)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어서 여기에 그 사연을 소개한다. 필자가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에서 박승석 기록을 발견한 이듬해인 2010년 3월 연천에 거주하고 있는 군민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군민은 1930년생인데 6세에 박승석으로부터 우두(牛痘)를 시술(施術)받은 사실을 증언하였으니 실로 박승석으로부터 우두시술(牛痘施術)을 받은 최초의 인물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 군민의 증언에 의하면 1935년 박승석이 연천에서 우두(牛痘)를 시술(施術)하였다는 것인데, 그가 1937년 향년(享年) 73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볼 때 박승석은 71세가 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두시술(牛痘施術)을 하였다는 것이며, 이는 사명감(使命感)이 없이는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면 당시 박승석은 가마를 타면서 우두가방을 지참하고 우두시술을 실시하였다고 군민은 증언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박승석이 49세가 되는 1913년에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의 면허(免許)를 취득하고 당시 연천군 군내면 상리 율동이라는 마을에서 최초로 우두시술을 실시하였다고 볼 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두시술을 하였으니 군민들의 생명을 구제하려고 혼신의 힘을 쏟은 그 활인정신(活人精神)에 숙연한 심정 금할 수 없다.

필자는 역사 속에 잊혀진 존재가 된 종두인허원의 실체(實體)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연천에서 종두인허원으로 활동했던 박승석에 대한 사례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근본적으로 박승석이 어떤 계기에 의하여 종두인허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연유(緣由)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박승석의 행적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은 제적등본(除籍謄本), 족보(族譜),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기사와 2023년에 발견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관련 기록 이외에 추가로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상과 같이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 박승석(朴勝錫)의 생애를 7회에 걸쳐서 소개하였는데, 20년 이상 종두인허원의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활인정신(活人精神)을 실천하였던 그의 숭고한 정신이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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