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동진(東晋)과 남송(南宋)은 중국사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 가운데 북방 민족에게 쫓겨서 장강 이남으로 옮겨간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진은 그나마 생기와 멋을 보여주었지만, 남송은 어딘지 슬픈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이 과연 사실에 부합될까? 아니면 강력한 한족 중심의 민족적 패권주의에 오염된 인식일까?

남송은 항주(杭州)를 정권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뜻밖에 초기 제왕들의 자취는 소흥(紹興)에 남아 있다. 소흥은 구도시 전체에서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은맛이 숨어 있다.

찹쌀에 보리누룩을 넣어서 담은 대표적 황주(黃酒)인 소흥주와 곰삭은 남도의 홍어와 비교할 수 있는 취두부(臭豆腐)는 소흥의 역사가 보인다. 많은 사람이 이 맛을 즐기려고 소흥을 찾는다. 그 가운데는 문인, 묵객, 학자들도 많을 것이다. 모두 나름대로 소흥의 맛을 즐길 준비를 하고 왔을 것이다.

소흥을 상징하는 회계산(會稽山)과 감호(鑑湖)의 빼어난 모습은 당연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과거 송육릉(宋六陵)을 보고 싶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있었더라도 이미 평지로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인들에게 남송의 역사는 부끄러운 추억이다. 그렇다고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역사가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숨결에 민감한 사람은 불쑥 솟아오른 황토 앞에 서면,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하며 처량한 느낌이 들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고, 냉정하고 깊은 사고를 통해 해석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송육릉을 몰라도 좋지만, 역사를 그대로 직시하려는 나는 적어도 송육릉이 소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한 주소는 소흥시에서 18㎞ 떨어진 절강성 소흥시 월성구(越城區) 부성진(富盛鎭) 보산(寶山) 남쪽 자락에 있다. 소흥의 두터운 땅은 남송의 여섯 황제를 품에 안았다. 금으로 끌려갔다가 시신으로 돌아온 북송 휘종(徽宗) 조길(趙佶)의 영우릉(永佑陵)과 철종의 황후 맹(孟)태후와 휘종의 황후 위(韋)태후의 묘는 송육릉의 주석과 같다. 그러므로 남송의 그늘은 항주가 아니라 소흥에 있다.

역사 여행에 의의를 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그것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터운 역사책에서도 작은 하나의 주석에 눈길이 더 미치는 나에게 소흥은 오랜 중국사에서 주석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오랜 분열을 극복한 통일제국이 반토막으로 변한 것은 확실한 치욕이다. 송의 황실인 조(趙)씨가 중국사를 대할 면목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씨 여섯 황제가 들어간 지하는 그들에게 역사의 지옥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잊었겠는가?

기억은 모든 사물의 또 다른 존재 형식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형태로 살았던 삶은 유형은 사라진 후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은 존재는 늘 새롭게 부활한다.

자기 집안의 강산을 지키지 못한 것은 그들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삶의 근거를 빼앗긴 피해는 국민 모두에게 돌아갔다. 북송의 멸망과 동시에 여진족의 금으로 끌려간 휘종 조길과 흠종(欽宗) 조환(趙桓) 두 황제는 빼앗긴 고토의 상징으로 변했다. 이 골칫거리는 일통(一統)이 아니라 병존(竝存)이 대세였던 시대에 장강 이남에서의 할거를 목표로 삼았던 남송의 집권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중국인들은 비굴하고 나약했던 남송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이런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여 송육릉은 깊은 망각 속에 잠겼다.

그러나 도굴꾼의 탐욕으로 번득이는 예리한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도굴꾼은 서역에서 온 승려 양련진가(楊璉眞伽)이다. 그들은 지하에서도 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잊혀졌다. 사람들은 도굴꾼까지도 찾지 않는 부끄러운 곳을 애써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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