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고대 동양의 전통적인 전쟁에서는 신의 상징을 납치하는 사건이 자주 신화로 각색된다. 그렇다면 헬렌의 상징을 납치한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가 이러한 신화의 변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좀 더 나아가면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 BC 1280년에 아라크산두에 의해 이루어졌고, 복수는 100년 후인 BC 1180년에 완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윌루사(Wilusa)왕이 아라크산두와 체결한 조약을 이후인 트로이7의 시대와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자료의 도움이 필요하다. 확실한 것은 아히야와가 항상 아나톨리아 서부와 윌루사 즉 트로이를 지배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 이유가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 경제에서 반드시 필요한 광물자원과 농산물을 얻을 수 있는 해로를 통제하려는 욕구가 작은 다툼에서 큰 전쟁에 이르기까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이 트로이 전쟁이었는지에 대한 문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전설은 신화의 힌트와 함께 그 전쟁과 시대를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영웅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하나인 일리아드가 있다. 이 전설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게 만든 것은 일리아드를 남긴 시인의 언어이다.

1988년까지 트로이는 폐허가 된 고고학적 유적지에 불과한 차나칼레의 한 작은 해안 마을에 불과했다. 이 폐허에는 여행자가 물 한 잔을 얻어 마실 곳도 없었고, 용변을 볼 곳은 더더구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오스만 코르프만은 1988년에 다시 발굴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로 트로이 유물을 정리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방문객이 이해하기 쉬운 박물관과 유적지의 관람코스가 마련되었다. 그는 차나칼레 사람들에게 꿈을 가르쳐주었다. 트로이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박물관은 2019년 3월 8일에 개관되었다. 이 박물관은 19세기 이후 세계 44개 박물관과 다양한 경로로 유통된 트로이 유물을 터키로 반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유물의 일부가 반환되었지만, 법적 절차 이외에도 소유자 스스로 반환하도록 윤리적 압력을 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유물이 발견된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걸림돌이 없었다. 이것이 고고학계에 대한 박물관의 압력이었다.

박물관은 한적한 마을과 주변 도시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오면서 차나칼레는 트로이를 보러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나도 며칠 동안 트로이 박물관을 중심으로 주변을 꼼꼼히 살피면서 오랜 과거로 돌아갔다. 마을의 담장에는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벽화로 장식되었다. 골목 끝자락에 있는 작은 집 마당에서 텃밭을 가꾸는 인자한 할머니를 만났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기꺼이 맞이하여 커피를 대접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와는 전혀 다른 너무도 강력한 그것을 나는 조금씩 끝까지 비웠다. 오랜 옛날 이곳에는 이 할머니처럼 다정다감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의 이야기는 영웅들과 귀족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진짜 주인공은 이 시공간을 살았던 수많은 보통 사람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되새김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인간은 신과 요괴와 지배자가 품어내는 독기를 제거하고, 절대권력의 아우라를 흩어버려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각자의 사회를 구성하는 세포이자, 모두가 존엄한 신이 될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지만 반드시 가야 한다. 트로이의 흔적은 우리를 너무도 먼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그들은 반드시 신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파리스는 하나의 사과로 신과 협상했고, 그 결과는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폐허로 변한 트로이는 여전히 인간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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