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

안도현(1961~ )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날,

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

방 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

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시평]

눈이 많은 계절이다. 소설(小雪)이니 대설(大雪)이니 하는 절기(節氣)의 이름을 붙여 이 시기를 부른다. 그러나 눈이 많이 내리면 오히려 그 겨울은 따듯하다고 한다. 눈이 내리면 날이 누그러지고 그래서 푸근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겨울을 우리는 난동(暖冬)이라고 부른다. 

한겨울이 지나고 아직 언 땅을 밀고 푸른 싹을 내미는 식물 중에는 상사화(相思花)가 있다. 겨우내 그 추위를 견디고 튼실한 줄기와 잎을 피워 올리는 상사화. 튼실한 잎이 모두 시들고 나면, 비로소 꽃대가 올라오고 꽃이 핀다. 잎이 다 시들고 난 뒤에야 피는 꽃. 그래서 그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를 못하므로,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상사화라는 이름을 지녔다.

대설이 가까운 어느 날 상사화 구근을 몇 뿌리 얻어다가 담 밑에 묻었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 이름을 언 땅 깊이 묻어두었다. 그리곤 며칠 있지 않아서 대설(大雪)이라는 그 이름답게 눈이 많이 내렸다. 두텁게 쌓인 눈은 상사화 구근을 품고 있는 흙을 푸근히 덮어주었다.   

겨울이 깊으면, 이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던가. 머잖아 찾아올 봄의, 그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 쉬는 소리를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숨죽여 듣는다. 이내 찾아올 봄의, 그 생각으로 뜨거워진다. 상사화, 서로에의 그리움이란 이렇듯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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