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강수곤(姜秀崑)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을 전하는 행장(行狀)을 비롯해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목민심서(牧民心書)의 공통점(共通點)이 있으니 고창 현감(高敞縣監)으로 재임하는 중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 파직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밝힌 자료는 권상하(權尙夏)가 전한 행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그가 이러한 기록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다면 현재까지도 강수곤이 무슨 이유로 현감에서 파직된 것인지 모를수도 있는 것이었으니 권상하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권상하는 강수곤의 행장에서 ‘향선 침몰(餉船沈沒)’로 인해 그가 파직(罷職)됐다고 전하고 있는데, 과연 어떠한 사건이길래 현감(縣監)이 파직까지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전하는 자료가 없으므로 행장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소개한다.

먼저 향선은 군량미(軍糧米)를 운반한 선박(船舶)이라 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소강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고 할 수 있는 1596(선조 29)년 어느 날에 선박이 침몰했다는 것인데, 그 경위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한 이후 고창 현감으로 재임(在任)중이던 강수곤이 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접한 고창현(高敞縣)의 백성들이 강수곤의 유임(留任)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까지 호소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그가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강수곤이 임기(任期)를 마치지 못하고 재임중에 파직이 됐으나 서울로 상경한 이후 상원(祥原)·안산(安山)·괴산(槐山) 세 고을의 군수(郡守)를 역임했으며, 돈녕부 첨정(敦寧府僉正)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더 이상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지 않았다.

강수곤은 1620(광해 12)년 5월 16일에 향년 66세를 일기(一期)로 별세했으며, 그해 9월에 광주(廣州) 구천리(龜川里) 인좌(寅坐)의 언덕에 장사했는데, 그로부터 360년이 지난 1980년 고양시 오금동 묘역(墓域)으로 이장(移葬)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끝으로 임진왜란 때 고창 현감으로서 활인정신(活人精神)을 실천해 수많은 생명을 구제했으나, 선박(船舶)이 침몰하는 사건으로 인해 파직됐던 강수곤의 생애(生涯)를 뒤돌아 보면서 우리 사회에 그의 생애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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