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 반격 막고 동부 공세
정체 전선 굳어지고 사기 저하
장기전 확실시… 러 군대 재건
서방의 ‘지원 약속’ 급격히 줄어
젤렌스키도 정치적 위기 맞아

바흐무트 들판의 수많은 포탄 구덩이[바흐무트=AP/뉴시스] 22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바흐무트 인근 전선 들판의 수많은 포탄 구덩이에 내렸던 눈이 남아 있다.. (출처: 뉴시스)
바흐무트 들판의 수많은 포탄 구덩이[바흐무트=AP/뉴시스] 22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바흐무트 인근 전선 들판의 수많은 포탄 구덩이에 내렸던 눈이 남아 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올렉시 틸렌코(36)는 올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점령지에서 몰아내는 해가 되기를 바랐다. 2023년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그의 남부 고향인 헤르손은 여전히 폭격에 시달리고 있으며 최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다.

작년에 헤르손을 떠나 키이우에서 실향민 500만명을 돕는 단체인 크리미아 SOS를 이끌고 있는 틸렌코는 러시아가 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훨씬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재건 중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지난 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서방이 어떻게든 방위 산업을 활성화해 장비를 교체하고 일반인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분쟁이 발생한 지 21개월이 넘었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으며 어느 쪽도 전장에서 확실한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다.

얼어붙은 참호에서 생활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자국 인구의 3배가 넘으며 자원이 풍부하고 핵무기로 무장한 강대국과의 두 번째 겨울 전면전을 치르면서 지쳐가고 있음을 인정했다.

우크라이나의 약 17.5%를 점령하고 있는 러시아는 남쪽과 동쪽의 거대한 방어선을 뚫으려 했던 우크라이나의 반격을 거의 견뎌낸 후 다시 동부에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정체된 전선은 서서히 굳어지고 있고 식을 줄 모르던 키이우의 사기도 조금씩 꺾이고 있으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발레리 잘루즈 총사령관 사이 의견 차이도 공공연하게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군사 원조를 확보해야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이목이 가자지구에 집중된 상황에서 이마저도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우크라이나인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전망은 1년 전 우크라이나가 수도 주변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헤르손을 비롯한 북동부와 남부 영토를 탈환하며 기대에 부응했던 활기찬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미 수십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도시와 마을이 파괴됐으며 수백만명이 집을 떠나고 수십만명이 점령지에 갇혀 인명 피해는 계속 늘고 있다.

무인기(드론)과 미사일 공격은 일상생활의 일부다.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에서는 아이들이 공습으로 죽지 않고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하에 학교를 짓고 있다.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제 전쟁은 정적이고 소모적으로 싸우는 ‘진지전’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움직이고 있다”며 전선이 고착하며 1차대전 방식의 참호전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틸렌코는 포격과 유도 폭탄의 지속적인 위협 때문에 헤르손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는 서방의 군사 지원이 더 빨리, 더 많이, 더 포괄적으로 이뤄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반격에 필수적이었던 공군력이 올해 매우 부족했으며 약속된 F-16 전투기도 오지 않았다고 틸렌코는 전했다.

드니프로강 둑에서 작전 중인 우크라이나군. (출처: 연합뉴스)
드니프로강 둑에서 작전 중인 우크라이나군. (출처: 연합뉴스)

◆“현재 푸틴 대통령의 승리의 순간”

서방으로부터의 필수적인 군사 및 재정 지원도 더 이상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 7일(현지시간) 연합뉴스에 따르면 독일 킬세계경제연구소(IfW Kiel)는 올해 8∼10월 새로 약속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인도·군사적 지원 규모가 21억 1천만 유로(약 3조원)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87%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 기간 기존 42개 지원국 중 20개국만이 새로운 지원 패키지를 약속했다.

크리스토프 트레베슈 연구위원은 “이 같은 규모는 지난 수개월간 지원 국가의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뒷받침한다”면서 “우크라이나는 갈수록 독일이나 미국, 북부와 동부 유럽 국가 등 소수의 핵심 공여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사용 권한(PDA)을 활용해 추가 군사 지원을 할 예정이지만 하원 공화당의 반대로 이번이 마지막 지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트레베슈 연구원은 이 패키지가 더 지연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지는 뚜렷이 강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날 미 방송 CNN도 “푸틴 대통령이 기다리던 순간, 즉 무엇인가를 굳이 하지 않아도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 지금”이라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장기전을 준비 중이다.

그는 최근 군대 병력을 전보다 17만명가량 늘려 총 132만명 규모로 확대하는 법안에 정식 서명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달 27일에는 2024년 재정 지출의 약 30%를 군대에 투입하는 군사비 대폭 증액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으로서는 최악의 위기 상황이다. 전황 교착에 서방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내부 불만까지 폭발해 안팎으로 지지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달 초 수도 키이우의 비탈리 클리치코 시장은 “우크라이나가 독재 국가화하고 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지를 잃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또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사전 경고를 무시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가 한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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