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왼쪽부터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 구약젼셔, 예수성교전서(제공: 대한성서공회) ⓒ천지일보 2023.12.06.
왼쪽부터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 구약젼셔, 예수성교전서(제공: 대한성서공회) ⓒ천지일보 2023.12.06.

◆ 존 로스 등의 첫 성경 번역

처음 한글 <성경>은 포르투갈 또는 프랑스 신부가 중국에서 <신약성경> 4복음서의 구절을 발췌하여 해석을 붙인 것이었다. <성경> 자체를 온전하게 번역하여 펴낸 것은 1882년 만주에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주관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의주 청년 서상륜, 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로스는 번역에 착수하며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민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번역한 성경을 의주 상인들에게 읽혀 보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그는 유월절은 ‘넘는 절’, 무교절은 ‘누룩 금하는 절’, 의인은 ‘옳은 자’, 예언하다는 ‘미리 말하다’, 기도는 ‘빌다’(현대표기로 수정함) 등 순한글의 고유어와 구어체를 쓰려고 노력하였다. 로스는 God에 딱 적합한 “하느닐”이란 단어가 한국인들에게 있는 것에 놀랐다.

로스는 선양에 문광서원이란 인쇄소를 설립했다. 만주에서는 번역한 <성경>을 인쇄할 한글 활자가 없어 일일이 목판에 붓으로 한글 글씨를 써서 칼로 판 후 일본에 보내 납활자 4만 개를 만들어 와서 마침내 1882년 3월 24일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3000부, 5월 12일에는 <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가 문광서원에서 발행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쪽복음 성경이 되었다.

아직 신약성서 전체가 번역되지 못해 각 복음서가 따로따로 나뉘어 간행되어 ‘쪽복음성경’이라 했다. 그 후 1883년에는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이, 1884년에는 마태복음이 출간되었다.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간되었으며, 1887년에 비로소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 이 성경이 <예수성교전서(예수聖敎全書)>로서 ‘로스역본(Ross Version)’이라고도 한다.

왼쪽부터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천지일보 2023.12.06.
왼쪽부터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천지일보 2023.12.06.

3년 뒤인 1885년 일본 시찰단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개종한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마가의 전복음셔언해>로 나왔다. 바로 그해 부활절에 개신교가 조선 선교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장로교)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감리교), 스크랜턴(W. B. Scranton, 감리교)이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들 선교사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한 성경에서 번역의 정확성, 사용된 용어, 문체, 활자 등에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로스와 의주 청년들의 번역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많이 쓰였었다. 그리하여 성경을 재번역하기 위해 1887년 2월 조선상임성서회(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를 조직했다. 그러나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 ⓒ천지일보 2023.12.06.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 ⓒ천지일보 2023.12.06.

◆ 레이놀즈 선교사

1892년 11월 3일 미국에서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고전 어문학자가 되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중등학교부터 존스 홉킨스의 박사과정(중퇴)까지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공부했다.

그 후 선교사가 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다닌 유니온신학교는 고전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습득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성경 원문 해석을 커리큘럼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고전 언어에 관심과 재능이 많았던 레이놀즈는 신학교에서 히브리어를 처음 배웠으나 열심히 하여 좋은 성적을 받았다.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글 학습 노트 ⓒ천지일보 2023.12.06.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글 학습 노트 ⓒ천지일보 2023.12.06.

한국에 온 레이놀즈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한국에 적응하고 선교기지 개척을 위하여 1894년과 1895년에 전라도와 남해안 일대를 탐사했는데, 일기와 메모지에 모든 한국 고유명사를 한글로 기록했을 뿐 아니라, 국영문 혼용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을 많이 사용하여 기록했다. 그 수첩 뒤에는 한글 발음법, 문법, 단어, 도량단위와 셈법, 일상회화, 5단계의 경속(敬俗)어체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레이놀즈와 함께 한글성경 번역 사업을 했던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조선지부장 휴 밀러(Hugh Miller)는 그가 ‘정확한 학문’과 ‘최고의 한국어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 신약성서 재번역

레이놀즈가 한국에 온 이듬해인 1893년 기존의 조선상임성서회의 활동이 부진하여 새로이 조선상임성서실행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of Korea)로 개편되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게일, 트롤로프로 공인번역위원회(Board of Official Translators)를 재조직했다. 레이놀즈는 이전의 상임성서회 위원으로 있었다가 1895년에 공인번역위원회에 합류했다.

공인번역위원회는 중국의 전례를 참고하여 각 번역위원이 조한규(아펜젤러), 김명준(언더우드, 레이놀즈), 송덕조(언더우드), 최병헌(스크랜턴), 이창직․정동명(게일), 김정삼·이승두(레이놀즈), 홍준(트롤로프), 문경호(존스) 등 언어조사의 도움을 받아 번역을 하고, 번역위원회의 모임에서 그 개정역을 공동 개정하여 공인 실험역(tentative version)으로 삼는 순서로 작업을 진행했다. 1896~1897년 겨울부터 매주 세 차례씩 모이거나, 사정에 따라 봄과 가을 한 두 달씩 모여 1900년 5월에는 로마서까지 실험역을 완성하고, 나머지 부분도 초역을 마쳤다.

레이놀즈 선교사와 번역 조사들 ⓒ천지일보 2023.12.06.
레이놀즈 선교사와 번역 조사들 ⓒ천지일보 2023.12.06.

그러는 동안 4복음서, 사도행전 그리고 일부 서신서들이 단권(쪽복음)으로 출간되었다. 그러자 한 권으로 된 신약전서를 요구하는 교회의 ‘외침이 너무 커서’ 번역위원회는 ‘마지못해’ 1900년 7월 한 권으로 된 신약전서를 발간했다.

공인번역위원회의 번역 초기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는데, 1897년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등에서부터 띄어쓰기를 하였다. 또한 지금 교회 용어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셰례’ ‘션지쟈’ ‘회ᄀᆡ’ 등과 같은 용어가 번역자들의 끊임없는 토론과 고심 끝에 결정되었다.

위원회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이면서도 동시에 식자층의 마음에 들도록 정숙하고도 깔끔한 문체를 사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신약젼셔>는 서울의 중상류 말을 채택함으로써 그 후 한글성경이 한글을 통일시키고 표준말을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이 <신약젼셔>는 번역위원회 검증을 거치지 않은 부분의 번역이 난삽했고, 신의 이름이 통일되지 않아 ‘하나님’과 ‘텬쥬’ 두 가지를 사용했다.

1894년 4월 18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했다. ⓒ천지일보 2023.12.06.
1894년 4월 18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했다. ⓒ천지일보 2023.12.06.

1902년 2월과 3월 각각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온 아펜젤러와 레이놀즈는 게일과 함께 다시 신약 개정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레이놀즈는 곧 목포로 전보되었다. 레이놀즈, 아펜젤러, 게일의 3인 번역위원회는 3월부터 고린도전서를 개정하기 시작했는데 레이놀즈가 목포로 옮겨가자 6월에는 한 달 정도 목포에서 공동 작업하기로 결정하였다.

아펜젤러와 조사 조한규는 인천에서 여객선을 타고 목포로 출발했다. 그런데 여객선이 군산 근해 어청도(於靑島) 부근 해상에서 선박충돌 사고로 침몰하여 두 사람은 목숨을 잃었고, 아펜젤러가 가지고 있던 참고자료도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성경 번역에 바친 생명값이었다(류대영, <윌리엄 레이놀즈의 남장로교 배경과 성경번역 사업>, <한국기독교와 역사> 33, 2010, p.23. 홍승표, <아펜젤러 조난사건의 진상과 의미>, <한국기독교와 역사> 31, 2009, pp.5~37 참조).

아펜젤러가 사망하자 성경번역 및 개정작업은 큰 난관에 부딪혔다. 이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는 남장로교 선교부 및 영국성서공회와 협의하여 레이놀즈를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은 그대로 둔 채 서울로 불러와서 성서번역과 개정작업에 전념케 하고, 봉급과 집세 등은 영국성서공회에서 전액 지불하게 했다. 선교사를 전임 번역자로 고용한 것이다.

이 3자 협약에 따라 레이놀즈는 1902년 9월부터 서울에서 머물면서 성경번역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레이놀즈는 공인역 구약전서가 발행되는 1910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유일한 전임 번역위원으로서 한글성경 번역 일을 주도했다.

번역위원들은 1904년 5월 신약전서 개정작업을 완료하여 그해 11월에 출간했다. 그러나 이 <신약젼셔>는 일관성 없는 용어, 철자법의 혼동, 필사(筆寫) 및 식자(植字) 과정의 잘못 등으로 인해 무려 1000개가 넘는 오류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번역위원회는 1904년 10월부터 시작한 구약 번역을 중단하고, 1905년 2월부터 1년 동안 <신약젼셔>를 다시 개정하여 1906년 공인역(Authorized Version) 최종본 2만 부를 발간했다. 이 <신약젼셔>가 최초의 공인역 성경으로서 이후 한국교회 공인 신약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1902년부터 그때까지 레이놀즈, 언더우드, 게일이 모여서 번역작업을 한 것이 무려 552회였다.

레이놀즈 무덤의 묘비. 미국 노스 케롤라이나 ⓒ천지일보 2023.12.06.
레이놀즈 무덤의 묘비. 미국 노스 케롤라이나 ⓒ천지일보 2023.12.06.

◆ 구약성경 번역

당초 1899년 2월 공인번역위원회는 구약성경 번역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공인역 신약전서의 개정작업이 끝나야 했기 때문에 1904년 신약전서 개정이 완성된 직후 구약 번역이 재개되었다. 신약의 번역은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하루에 6~7절 이상 번역하지 못했으나, 구약성경은 ‘스타일과 주제가 훨씬 단순’했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오전에만 40~50절씩 번역했다. 그러나 신약에서 다시 여러 오류 문제가 제기되어 재개정 작업 때문에 구약성경 번역은 다시 미뤄졌다. 1906년 2월 신약전서 공인역이 완성되었다.

번역위원회에는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세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창세기 일부와 시편이 번역이 된 상태에서 언더우드와 게일마저 각각 질병과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1906년 9월 성서위원회는 유대인으로 히브리어에 능숙한 북장로교의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와 남감리교의 윌라드 글리던 크램(Willard Gliden Cram, 1875~1969)을 추가로 번역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번역위원회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석한 사람은 레이놀즈와 한국인 조사 이창직, 김정삼뿐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이 세 사람만으로 번역위원회를 운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1907년 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한학에 뛰어난 이창직(李昌稙)과 김정삼(金鼎三)을 번역위원으로 임명했다. 한국인 조사들의 역할과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인 조사들은 더 많은 봉급과 관직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성경 번역작업에 참여해 왔었다.

한국인 조사-번역위원은 번역된 한글을 검증하고 더 좋은 표현으로 다듬는 일을 담당했고, 다른 선교사 번역위원들의 참여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구약성경의 번역은 사실상 레이놀즈 손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주에서 레이놀즈는 1908년 4월부터 1910년 4월까지 2년 동안 이미 번역위원회가 번역하여 출간한 창세기, 시편,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상·하, 말라기와 게일이 번역했던 욥기, 호세아, 예레미야를 제외한 구약의 모든 부분을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욥기와 호세아도 그의 손으로 수정을 보았다. 때문에 게일이 번역하고 언더우드가 교열하여 완성된 예레미야를 제외하고 구약은 그의 손을 직접 거쳐 번역이 이루어졌다.

최종적으로 출판사에 넘길 수 있는 필사본까지 완성한 것은 1910년 4월 2일로서 번역위원회가 구약 번역을 시작한지 10여 년 만이었다. <구약전셔>는 1911년 3월 요코하마에서 3만 부가 인쇄되었다. 이리하여 <신약젼셔>와 <구약젼셔>를 합친 <셩경젼셔>가 출간되어 성경전체의 한글 공인역을 완성했다. 만주에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출간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레이놀즈의 모교 햄던-시드니 대학은 성경번역이라는 그의 ‘빛나는 업적’을 인정하여 1908년 6월 그에게 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다.

<참고문헌>
류대영·옥성득·이만열 공저, <대한성서공회사> Ⅱ -번역·반포와 권서사업-, 대한성서공회, 1994.

류대영, <윌리엄 레이놀즈의 남장로교 배경과 성경번역 사업>, <한국기독교와 역사> 33,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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