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산천을 답사하다 보면 무릉리, 도원리라고 하는 이름이 많다. 굽어진 강을 끼고 높이 솟은 산, 봄이면 복숭아꽃이 피는 곳에는 이런 이름이 붙어있다. 충북 괴산 청천면 도원리에는 삼국시대 큰 절터가 있다. 마을 입구에 긴 장대석에는 옛날 사람들이 ‘무릉’ ‘도원’이라는 한문 표지석까지 만들어 놓았다.

무릉도원이라는 표현은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처음 지은 글이다. 한 어부가 꿈속에 배를 타고 동굴에 들어갔는데 복숭아꽃이 만발한 신비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은 세상과 다른 풍경이었으며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진나라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 수백년이 지난 시대를 알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부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했으며 세상이 변한 것에 대해 흥미롭게 질문했다.

대접을 잘 받은 어부는 배를 타고 돌아와 이를 태수에게 말했다. 태수가 흥미롭게 여겨 사람들을 보냈으나 끝내 동굴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무릉도원은 천 수백년 문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상의 혼탁함을 피해 자연으로 돌아가 욕심 없이 사는 풍모를 사랑했기 때문인가. 세상이 어려울수록 도원으로 낙향해 산수를 벗 삼아 사는 선비들이 많았다.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仙源里)는 ‘선동(仙洞)’으로도 불린다. ‘선동’은 바로 ‘무릉도원’의 약칭이며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고대 당, 송 시인들이나 명, 청대 문사들이 선동이라는 이름을 즐겨 썼는데 조선 선비들도 이 아취(雅趣)를 따랐다.

임고면은 예부터 토호들이 많이 살아온 동네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중기에 영천에 낙향한 정몽주 선생의 후손들을 비롯해 여러 양반가가 살았다.

영천시에 있던 조선시대 장수도역(長水道驛)은 일본에 가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며칠을 묵으면서 장구를 점검한 곳이다. 통신사 일행 중에는 도화서 화원도 따라갔다.

당시 장수도 찰방은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관아의 군사들을 시켜 마상재까지 시연해 장도를 축하해 줬다. 조선시대 영천지역 문서에 장수도역에 딸린 관기가 80여명이나 있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성대한 접대풍속을 알려 준다.

최근 필자는 서울의 한 컬렉터가 소장 중인 조선 정조시기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릉도원도’를 고증했다. 세종 때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는 북송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무릉도원도는 남종화풍으로 산수를 담아하게 그린 조선 산수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겸재 정선이나 이인문의 화풍과도 닮아있다.

무릉도원도는 두꺼운 한지에 담채로 그린 6곡 병풍이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복숭아꽃은 색이 많이 퇴색했다. 병풍 각 장마다 윗부분에 ‘도연명의 무릉도원기’를 정중한 필치로 써 놓았다. 어선과 수목, 기암괴석, 인물 표현은 조선 도화서 화원의 필치를 보여준다.

이 그림이 영천 선동에서 나온 것임을 알려주는 증거는 바로 병풍 뒷면에 배접 된 많은 간찰이다. 인조시기 영천의 효자 박경립과 영천 선비들이 보낸 여러 장의 간찰이 부착돼 있다. 간찰 말미에는 ‘선동입납(仙洞入納)’이라는 묵기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바로 선동으로 보낸 편지라는 뜻이다.

이 무릉도원도는 이곳을 지나던 도화서 화원이 지역 토호들의 요청으로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평소 술을 좋아한 최북(崔北)은 마음에 맞는 선동의 호방한 선비들을 만나 경치를 완상하며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무릉도원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낙원이다. 다툼이 없는 선경을 꿈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200여년 전 그려진 영천 ‘선동 무릉도원도’는 우리 민족의 연면한 자연 사랑을 입증하는 진귀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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