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포도(葡萄)’는 삼국시대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의 포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시대 세종때 문신인 박흥생(朴興生, 1375~1458)이 저술한 의역학서 ‘촬요신서(撮要新書)’라고 하지만 태조 7년(1398) 9월 1일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수정포도(水精葡萄)’가 나와 있다.

‘포도’라는 이름은 각각 ‘匍(길 포)’와 ‘匋(질그릇 도)’에 ‘풀초부(艸)’가 추가된 것이며, 양자 모두 ‘포도’라는 단어만을 위해서 조어됐다. 덕분에 이름에 쓰인 한자가 ‘포도 포’ ‘포도 도’로, 애초에 포도를 위해서 조어된 단어라 둘 다 뜻이 포도다.

이 어휘의 어원을 처음으로 고증한 것은 동양학자 베르톨트 라우퍼(Berthold Laufer)로, 그는 한자어 포도가 페르시아의 친척어인 박트리아어에서 포도주를 뜻하던 단어 ‘badawa’를 음차한 것이라 밝혔다. 후속 연구에서 이는 구체적으로 아카드어 ‘batu(포도주 항아리)’ ‘batium(용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단어로 추정됐다.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와 ‘蒲陶’ ‘蒲萄’ 등으로 표기되다 나중에 ‘葡萄(중고한어 발음으로 /*buo dau/)’로 통일됐고, 이 한자어가 다시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됐다. 일본어 ‘葡(ぶ)萄(どう)(부도ー)’, 베트남어 ‘bồ đào’ 역시 여기서 유래했다.

한국어로는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순우리말로 훈을 ‘멀위’로 달고 있으며, ‘머래’ ‘머루’라고도 불렸다. 다만 오늘날 머루는 속은 같으나 흔히 재배되는 비티스 비니훼라(Vitis vinifera)종과 구별되는 Vitis coignetiae(산포도) 종만을 말한다.

태조는 포도로 세자와 왕자들의 마음을 떠본다.

“임금이 수정포도를 먹고 싶어 하여, 조순(曹恂)을 명하여 세자와 여러 왕자에게 교지를 전했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영자(影子)를 그려서 사모(思慕)하게 되는데, 내가 비록 쇠약하나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너희들은 다행한 편이다. 지금 병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수정포도를 먹고자 한다.’ 세자와 여러 왕자가 모두 소리를 높여 울면서 즉시 상림원 사(上林園史) 한간(韓幹)에게 명해 유후사(留後司)와 기내 좌도(畿內左道)에 널리 구하였는데, 경력(經歷) 김정준(金廷雋)이 산포도가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7년 9월 1일).”

태조는 매우 기뻐해 한간에게 쌀 10석을 내려줬다. 태조는 매양 목이 마를 적엔 포도 한두 개를 맛보니, 병이 이로부터 회복됐다고 한다.

포도는 태조뿐만 아니라 태종도 좋아했던 것 같다. 검교참의(檢校參議) 박승(朴昇)이 태종에게 포도를 바치니 “박승이 예전에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는데,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다”며 쌀 다섯석을 내려줬다. 세종께서 일찍이 병환이 나서 포도를 맛보려고 했으나 절후가 늦어서 진상할 수가 없었다. 정척이 이 말을 듣고서 곧 집 정원에 있던 수정포도를 따서 올렸더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가슴 속이 답답하더니, 이 포도를 먹고 상쾌하게 됐다’고 했다. 이로부터 해마다 포도를 반드시 따서 올렸으며, 세조조(世祖朝) 때에도 또한 포도를 따서 올렸다. 포도는 조선조 태조 이후 임금들이 좋아했던 과일임이 틀림없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에 포도를 말려 건포도 형태로 공물을 비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마유포도(馬乳葡萄) 한 가지를 승정원에 내리시면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맛보고 각기 시(詩)를 지어 바치라”하니, 승지들이 사은(謝恩)하기를 “신 등이 이전에 맛보지 못하던 것입니다. 산중에 비록 더러 있기는 했으나 서리와 눈 속에 그 맛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1500) 10월 14일).’

이때까지만 해도 포도의 종류는 수정포도와 마유포도였던 것 같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