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 인터뷰

전쟁은 분리를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 연인 간, 안식처에서 피난처로, 삶에서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맞게 한다. 한국에서도 70여년 전 동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다. 3여년에 걸쳐 있어진 비극에는 국군 62만여명 과 유엔군 15만여명 등 77만여명이 전사, 부상, 실종됐고 이재민은 1000만여명에 달했다.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니라 현재 정전 중이다. 본지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발발부터 종전까지 주요 과정을 짚어보고 참전 영웅들이 전하는 전쟁의 실상을 통해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가 지난달 29일 인천미추홀구 용현동에 위치한 범우용사촌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12.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가 지난달 29일 인천미추홀구 용현동에 위치한 범우용사촌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12.

[천지일보=유영선 기자] “등대에 불을 밝혀라!”

1950년 9월 14일 오후 7시,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는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대북 첩보부대 ‘켈로부대(KLO, Korea Liaison Office, 주한 첩보연락처)’ 요원들에게 떨어졌다. 켈로부대는 9월 15일 새벽 2시 20분, 인천항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혔고 성조기를 높이 계양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의 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함대 261척에게 인천 앞 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6.25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이었다.

훈련소장 이철(좌). (제공: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훈련소장 이철(좌). (제공: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적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에서는 반격을 취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팔미도 탈환작전은 연합상륙부대가 인천항의 원활한 진입을 위해 그 길목인 팔미도를 탈환해 등대를 점등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이 된 작전이었다. 당시 이 결정적 임무를 수행한 이들은 ‘군번 없는 군인’ 켈로부대원들이었다. 켈로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북한의 정부·군·산업 기관에 침투해 정보 수집을 하기 위해 1949년 6월 1일 만든 첩보조직이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첩보활동을 펼쳤다.

1951년 7월 미 ‘8240부대’가 창설되자 켈로부대는 8240부대로 통합됐다. 8240부대 예하에는 유격부대가 30여개에 달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자 8240부대는 국군으로 소속이 변경돼 ‘8250부대’로 다시 재창설됐다가 1954년 2월 공식 해체됐다. 켈로부대 소속으로 부부 첩보원으로 활동한 고(故) 이철(남)·최상렬(여)은 올해 국방부가 인정한 6.25전쟁 당시 비정규군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숨은 영웅’이다.

KLO·8240 고트 특수공작대 P훈련소에서 부대원들이 사격 훈련하는 모습.  (제공: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KLO·8240 고트 특수공작대 P훈련소에서 부대원들이 사격 훈련하는 모습. (제공: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당시 이철 선생은 6.25전쟁 초기 서울 및 인천 지역의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서울에 잠입해 아내 최상렬의 집 지하실에 첩보기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인민군 또는 피난민 부부로 위장해 서울 일대 인민군 사령부 동향과 인민군 배치 등 중요한 첩보를 보고했다.

특히 이철 선생은 영화 ‘인천상륙작전’ 켈로부대원의 모티브가 됐던 인물로 ‘팔미도 탈환작전’의 핵심요원이었다. 또 그는 북진작전 간에는 평양 일대에 첩보기지를 구축하고, 중공군 참전 상황과 같은 핵심 정보를 보고하는 등 탁월한 켈로부대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에는 켈로부대 첩보부대장 및 교육대장의 임무를 수행하며 첩보 활동 및 첩보원 양성에 있어 큰 업적을 남겼다.

1951년 11월 30일 서울시장 주례로 열린 켈로부대원 12쌍 합동결혼식. 이철과 최상렬도 이날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제공: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1951년 11월 30일 서울시장 주례로 열린 켈로부대원 12쌍 합동결혼식. 이철과 최상렬도 이날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제공: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母 서울집, 임시 작전 본부로 사용”

본지는 최근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이성훈(70) 범우용사촌 대표를 만났다. 6.25전쟁 때 공을 세운 부친을 닮아 그도 1976년 2월 학군단(ROTC) 14기로 임관해 군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임관한 지 1년이 넘어서 1977년 5월 GOP작전에 투입됐다가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절단하는 안타까운 사고를 당해 40년 넘게 휠체어를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이 대표는 부친 이철 선생이 계인주 대령의 소집으로 켈로부대 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운을 뗐다.

이 대표는 “아버님이 팔미도에 직접 들어가신 것은 아니었다”면서 “당시 켈로부대가 세 개 부대로 운영됐는데 아버님은 고트(Goat)부대의 부대장을 맡았다. 요새 개념으로 팀장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철 선생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서울탈환을 위해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던 서울을 오가면서 9.28 서울수복을 위한 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철 선생의 가족사진. (아래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이철, 최상렬, 막내 아들 이성대, 둘째 딸 이성숙, 첫째 딸 이성희, 장남 이성훈(당시나이 23세). (제공: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
이철 선생의 가족사진. (아래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이철, 최상렬, 막내 아들 이성대, 둘째 딸 이성숙, 첫째 딸 이성희, 장남 이성훈(당시나이 23세). (제공: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

이 대표는 “부모님이 연애하는 기간에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어머님이 ‘종로1가 9번지’에 사셨다”며 “알고 있는 서울의 연고지가 어머님 집 밖에 없어서 그곳이 켈로부대 임시 작전 본부 아지트가 됐고 어머님도 자연스럽게 첩보원이 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부모님은 1951년 11월 30일 서울시장 주례로 열린 켈로부대원 12쌍 합동결혼식을 통해 실제 부부가 됐다.

그는 “낮에는 적의 감시로 아버님이 나갈 수 없어서 어머님이 위장하고 어떤 지역에서 군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아버님에게 알려줬다”면서 “아버님은 파악된 정보를 맥아더 사령부에 알리는 식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당시 첩보원의 20%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남자가 활동하기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며 “여성은 애를 데리고 있다든가 허름하게 아줌마 행색을 할 수 있어서 적진 지역이었지만 활동하기가 수월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가 지난달 29일 인천미추홀구 용현동에 위치한 범우용사촌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12.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성훈 범우용사촌 대표가 지난달 29일 인천미추홀구 용현동에 위치한 범우용사촌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12.

◆“父 교훈, 살게 하는 강한 힘이 됐다”

켈로부대원들은 전선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시로 사선을 넘나들었고 상당수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철 선생은 휴전이 돼 북파된 부하들의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생전 늘 안타까워했다.

이 대표는 “아버님은 부대원들을 다 귀가시키지 못하고 휴전되는 바람에 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셨다”며 “2007년경 켈로부대원들이 아버님을 찾아와 앞장서 우리를 대변할 지도자는 당신밖에 없다며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회장을 맡아 달라”고 말했다.

이철 선생은 이후 7~8년간 ‘한국전쟁특수첩보공작대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 회장을 맡아 살아남은 켈로부대원들 위한 보상에 관한 일을 하다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10여년이 지난 후 국방부는 올해부터 6.25전쟁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적 지역에 침투해 첩보 수집 및 유격 활동 등 국가를 위해 특별한 희생을 한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이들에게 공로금을 천만원씩 지급하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달 2일 6.25전쟁 당시 비정규군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숨은 영웅’과 이들의 유가족, 관련 단체장을 초청한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또한 이철 선생은 불의의 사고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 대표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준 은인이기도 했다.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은 아들을 한달음에 찾아온 이철 선생은 “다리는 움직이는 서비스 기관에 불과한 거야. 머리가 살았으니깐 걱정하지 않아도 돼. 머리가 안 다쳤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이 대표를 위로했다고 한다.

당시 이 대표를 치료하던 정형외과 의사는 “백이면 백 부모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다. ‘다리는 서비스 기관이니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부모는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깐 아버님이 하신 그 얘기가 진짜 쉬운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며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면서 살아왔는데 아버님의 그런 교훈들이 저를 강하게 하는 요소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상기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장이 지난 7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12.
김상기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장이 지난 7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12.

“이철 선생, 흐느끼며 아들 GOP 사고 크게 아파했다”

 김상기 KLO•8240부대 전우회 총연합회장 인터뷰

“카리스마 있고 투철한 애국심·공사 구분으로 존경받아”

“그분(이철)이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가 투철한 애국심입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다 존경합니다. 카리스마도 있고 힘도 장사에요.”

최근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상기(90) KLO·8240부대전우회 총연합회장은 고 이철 선생과 관련해 “공과 사가 분명하고 대화해보면 이분의 생각이 전부 합리적이고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같이 회상했다.

전우회에서 사무총장만 약 17년간 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 회장은 6.25전쟁 땐 이철 선생을 알지 못하다가 전우회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철 선생은)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도, 자신이 아는 사람을 채용하지도 않았다”며 “인사 담당자들이 각자 알아서 하게 했다. 그러니 존경받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 김 회장은 어느날 이철 선생에게 아드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철 선생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더니 돌연 눈물을 흘렸다고 김 회장은 말했다. 평소 이철 선생이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김 회장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철 선생은 장남인 이성훈 대표의 GOP 사고를 많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철 선생이 “내가 아비로서 아들한테 너무 강하게 한 것 같다”며 아들을 전방에서 근무를 서도록 몰아세운 것을 크게 괴로워했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또 그는 정전협정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김 회장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압록강까지 올라가서 남북을 통일시키겠다는 결의가 굳었다”면서 “하지만 당시 중공군이 비밀리에 2~3일에 걸쳐 숨어 들어와서 정보에 나타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맥아더 사령관의 소신대로 모든 작전을 성공시켜 그때 통일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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