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닭갈비는 맛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닭의 갈비 즉 계륵(鷄肋)은 그다지 취할 만한 가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차마 버릴 수도 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데 주로 쓰이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나라의 조조가 한중(漢中)을 치던 중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서 명을 내리기를 ‘계륵’이라 하니, 관속들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는데, 주부(主簿)로 있던 양수(楊脩)는 문득 행장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이 놀라서 양수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양수가 말하기를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부계륵 식지칙무소득 기지칙여가석) 닭갈비는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깝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이는 한중(漢中)을 비유한 것이다.

계륵이라는 고사는 서거정(徐居正)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도 곧잘 시문(詩文) 등에 인용했다.

이렇게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가 춘천을 비롯한 태백과 삼척을 중심으로 맛있는 향토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러나 사실 닭갈비에 그다지 살은 많지 않다.

말이 닭갈비지 갈비가 아닌 토막 낸 닭의 가슴살이나 다릿살을 도톰하게 펴서 양념에 잰 후 야채와 함께 철판에 볶거나 숯불에 구워 먹는 것이다.

그러나 1960~1970년대의 닭갈비는 닭의 갈비뼈(肋骨)가 붙어있는 갈빗살을 썩둑 썩둑 썰어서 매운 양념에 재워서 석쇠로 된 넓은 불판에 떡, 야채와 함께 구워 먹었다고 한다.

강원도 춘천시 중앙로 2가 18번지에 판자로 지은 조그만 장소에서 돼지고기로 영업을 하던 김영석이 1960년 어느 날 돼지고기를 구하기가 어려워 닭 2마리를 사 와서 토막 내 돼지갈비처럼 만들어 보겠다고 해 연구 끝에 닭을 발라서 양념해 12시간 재운 뒤 숯불에 구워 ‘닭 불고기’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닭갈비의 유래다.

본래 닭갈비는 양계장이 많던 홍천과 춘천에서 시작됐다. 최초로 유래한 춘천식은 숯불에 석쇠를 놓고 양념 된 닭의 갈비살을 구워 먹는 방식이었다. 이 숯불 닭갈비가 소양강댐 건설 당시의 인부들과 102보충대를 비롯한 군부대 장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춘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0년대 초에는 닭갈비 1대의 값이 100원이라 ‘서민 갈비’ ‘대학생 갈비’라고 불렸다. 춘천에는 여전히 초창기처럼 숯불구이 닭갈비를 하는 집도 있다. 주로 소양강댐 언저리에 있는 닭갈비집 몇 군데가 숯불구이식을 하고 있으며, 중앙로 인근에도 숯불식 닭갈비집이 한 군데 있다. 이런 가게는 숯불 닭갈비라고 따로 표시하는 편이다.

강원도 태백시와 삼척시 일부 지역(도계읍, 가곡면, 신기면, 하장면)에서는 특이하게도 육수를 자작자작하게 부어서 끓여 먹는다. 닭볶음탕처럼 될 것 같지만 그것과는 묘하게 다른 음식이다.

1960~1980년대 초중반의 석탄산업 전성기, 특히 경제성장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난 1970년대 후반 이후 물닭갈비는 태백과 삼척 일대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국물을 찾으면서 생긴 요리로 지역 명물로 자리 잡게 됐다고 한다.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광부들의 특성상 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쇠고기는 쉽게 사먹기는 부담스러운 음식이었고, 따라서 주머니에 여유가 좀 있을 때는 돼지 삼겹살을 굽고, 주머니가 가벼울 때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물닭갈비를 시켜 육수에 익힌 면과 야채를 먼저 먹고 그사이 익은 닭고기를 먹은 뒤 남은 국물에 밥을 넣어 비벼 볶은 밥까지 푸짐하게 즐겨 먹었다고 한다.

특히 태백시 물닭갈비는 냉이가 들어가 자작한 국물에 냉이향이 풍기는 풍미가 있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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