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689(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핵심 포인트는 숙종(肅宗)이 장희빈(張禧嬪)의 소생(所生)인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冊封)하려다가 서인(西人)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이를 강행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유배(流配)되어 사사(賜死)된 것을 비롯하여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퇴우(退憂) 김수흥(金壽興)도 유배(流配)되거나 사사(賜死)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숙종은 왕비(王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비(廢妃)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노론측(老論側)이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숙종은 이러한 신하(臣下)들의 처사에 분노하여 주동자(主動者)인 오두인을 비롯하여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쌍백당(雙栢堂) 이세화(李世華)를 직접 유배(流配)보냈는데, 특히 박태보는 유배 중에 노량진에서 고문(拷問)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동안 집권 세력(執權勢力)이었던 서인(西人)이 축출되고 남인(南人)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박세채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하여 결국 관직(官職)을 강등(降等)당하고 파주에 있는 남계서당(南溪書堂)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學問硏究)와 저술(著述), 제자(弟子)의 교육(敎育)에 전념(專念)하였는데 당시 그의 연령(年齡)은 59세였다.

남계서당은 박세채가 기사환국 이후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파주 광탄면 창만리에 우거(寓居)하면서 문인(門人)들을 양성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남계(南溪)라는 그의 호(號)는 광탄천이 파주의 남쪽에 위치한 하천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박세채는 광탄에 우거한 것을 계기로 남계 선생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가 설립한 남계서당이 서원(書院)과는 그 기능이 다르지만 박세채 같은 대학자가 직접 운영한 서당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수준만큼은 어느 서원에 못지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1689(숙종 15)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1695(숙종 21)년까지 6년의 기간이 박세채의 일평생(一平生)에 있어서 많은 저서(著書)를 통해 큰 업적(業績)을 남겼던 시기(時期)리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박세채는 이 기간 중에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學者)들과 서신(書信)을 교류(交流)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道統) 연원(淵源)을 밝히려는 학문적인 변화를 보였다.

당시 남계(南溪)가 저술한 책은 양명학변(陽明學辨)을 비롯하여 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 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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