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1989년 초연 이후 ‘롱런’ 기록을 잇고 있는 서울 대학로 터줏대감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를 엊그제 아내와 관람했다.

1996년에도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봤던 작품인데, 늙은 도둑 역을 맡던 명계남 대신 다른 연기자가 출연했다. ‘덜’ 늙은 도둑 역의 박철민은 20년 넘게 같은 역으로 나오고 있어 반가웠다. 관객을 사로잡는 그의 애드리브와 코믹 연기는 압권이었다.

두 ‘늘근도둑’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돌직구 만담은 ‘촌철살인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단순 절도 전과 18범 ‘더 늘근도둑’과 사기 전과 12범 ‘덜 늘근도둑’은 대통령 취임 특사로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3일 만에 노후 대책을 위한 마지막 한탕을 꿈꾸며 미술관에 잠입한다. ‘높으신 그분’의 미술관에서 금고를 털려다 경비견에 물어뜯기며 절도 행각은 실패한다.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가 수사를 받으면서도 기발한 애드리브에 곁들여 따끔한 시사풍자를 작렬한다. 전직 대통령을 우롱하고 청년 실업, 노인 빈곤, 국정농단 사태, 문화계 블랙리스트 같은 정치, 사회, 경제적 이슈를 두루 건드린다.

이런 장면을 보면 1980년 ‘광주 학살’의 여진으로 어둠에 짓눌린 대학 교정에서 펼쳐졌던 탈춤이 생각난다. 당시 독재정권 타도를 겨냥한 민중 노래, 마당극, 풍물이 대학가에 풍미했다. 축제 때 무대에 올려진 공옥진 여사의 ‘병신춤’이나 각설이 타령 ‘품바’가 울분에 찬 마음을 달래줬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대학로에 가면 젊음을 느낀다. ‘공연·예술의 메카’이자 ‘젊은이들의 거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학로’라는 이름 자체가 청춘을 소환해주는 것 같다.

늘근도둑이야기 연극 무대인 ‘아트 포레스트’ 소극장을 찾기 위해 골목을 걷다 보니 ‘미니 캠퍼스’가 의외로 눈에 많이 띄었다. 예술 분야를 특성화하려는 홍익대, 국민대, 상명대, 한성대, 동덕여대, 서경대, 서울여대 등 여러 대학의 ‘공연예술센터’ ‘디자인센터’ ‘아트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극장이 몰려있는 대학로 위, 아래쪽엔 큰 캠퍼스를 갖춘 방송통신대학을 비롯해 명륜동의 성균관대 인문사회캠퍼스, 혜화동의 가톨릭대 성심교정, 삼선동의 한성대 교정이 있었다. 성균관대 정문 입구엔 공자를 비롯한 성현 133명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조선 국립대 최고학부인 ‘명륜당(明倫堂)’이 옛 건물 그대로 보존돼 있다.

대학로에 온 김에 500년 넘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를 간직한 대성전과 명륜당도 둘러봤다. 대성전의 현판 글씨가 조선 최고 명필가 한석봉의 친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백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학생식당도 있었다. 총 33칸 규모의 진사식당(進士食堂)이라는 곳이다. 요즘처럼 세 끼가 아닌 아침, 저녁 두 끼의 식사를 했다고 한다. 명륜당 안쪽 벽에 걸려 있는 여러 편액 중 ‘박문조례(博文釣禮)’가 마음에 닿았다. 한자가 서툴러 해석이 정확하지 않겠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넓게 해서 예를 구하고 갖추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오늘날 최고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 이런 포부와 목표를 갖고 있을까. 한국 청년들은 어릴 때부터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고, 막상 대학을 졸업하면 ‘헬조선’ ‘흙수저’ 타령을 한다. 세계 최고 자살률, 노인 빈곤율과 최저의 합계출산율과 같은 암울한 사회 지표는 어찌할 것인가.

세계 100위권에 속하는 서울대, 연세대, KAIST 등의 유수 대학이 아니면 존폐위기에 놓인 대학이 많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학령인구 감소로 지난해 기준 지방대 214곳 중 44곳(20.6%)의 신입생 충원율이 80%에도 미치지 못한다.

컴퓨터가 스스로 생각하는 단계에 접어든 시대에 대학도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학생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점을 찾는 자기주도적이고, 창의적 인재를 길러야 한다.

최근 교육부로부터 원격대학(사이버대) 설립인가를 받은 캠퍼스 없는 한국형 미네르바대학 ‘태재대’나 스페인 몬드라곤대학교 레인 과정의 한국 캠퍼스인 협동조합 형태 ‘레인서울’, 직업 디자이너를 키우고 있는 디자인 독립학교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파티)’ 같은 대안대학들이 새로운 교육모델을 제시해주면 좋겠다. 대학로의 강점인 다양성과 개방성이 사그라지지 않고 대학가에도 널리 퍼져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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