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 제8대 왕 예종·안순왕후의 능

서오릉 최초로 임금이 묻힌 ‘창릉’
형제가 20세에 죽고 서오릉 묻혀
영릉·광릉 조성 후 예고 없이 승하
첫 왕후 장순왕후는 외로이 공릉에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오릉의 ‘창릉’은 예종(이황, 조선 제8대 왕, 1450~1469)과 안순왕후가 묻힌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형 덕종의 ‘경릉’이 세자의 무덤이었던 반면, 창릉은 서오릉 최초의 재위했던 왕의 능이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형제가 이웃하고 있다. 예종은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죽자 뒤를 이어 세자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예종의 첫 부인 장순왕후는 17세에 아들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죽어 파주 공릉에 묻혔다. 둘째 부인 안순왕후는 남편 사후 29년 이상 대비로 지냈다. 55세에 숨을 거두고 창릉의 예종 곁에 자리했다.

예종은 수명(20세)과 재위 기간(15개월)이 조선왕조 두 번째로 짧았다. 8살 때에 형이 죽고 4년 후 부인 세자빈(훗날 장순왕후)이, 3년 후 첫아들(인성대군)이, 그리고 4년 후 19살에 아버지 세조가 훙(薨, 사망)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두 개의 왕릉을 조성했다. 세조가 생전에 계획한 세종 영릉을 여주로 옮겼는데 조선 최초의 왕릉 이전이었다. 또한 아버지 세조의 광릉도 조성했다. 왕에게는 고강도의 스트레스와 체력 소진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맞이했으니 어찌하여 형과 아우가 20세에 단명하고 부인 왕비들은 30여년을 왕대비로 살았는가. 서오릉의 우거진 숲길에 들어서 가장 멀리 자리한 창릉으로 향했다.

‘창릉 전경’. 서오릉에 있으며 최초로 재위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서오릉에는 형 덕종의 ‘경릉’과 동생 예종의 ‘창릉’이 함께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창릉 전경’. 서오릉에 있으며 최초로 재위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서오릉에는 형 덕종의 ‘경릉’과 동생 예종의 ‘창릉’이 함께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왕의 무덤, 명당을 찾아라

세조의 말년은 뒤숭숭했다. 세조는 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자식은 요절했으며 ‘이시애의 난’등 어수선한 정국으로 힘들어했고 건강도 나빠졌다. 불교와 풍수지리에 의존한 세조는 원각사 건립과 상원사 중수를 명했으며 아버지 세종의 무덤에 대한 길흉을 따져보더니 천장을 결심했다. 1467년 봄 영릉 개장을 추진키로 했으나 세상을 뜨고 말았다. 1468년 즉위한 예종은 할아버지의 영릉 천장은 물론 아버지 세조의 광릉까지 조성해야 했다. 세조의 능은 남양주 주엽산 아래 정흠지의 분묘로 정했다. 1468년 9월 18일 실록은 “광주 정흠지의 분영이 산 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능침에 매우 합당합니다”라고 했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임금이 거둥(나들이)한 후 정했다. 또한 세조의 원찰(명복을 비는 절)로써 봉선사를 중창했다. 영릉 천장은 12월에 여흥(여주) 이계전의 분묘로 정했는데 옆에 이인손의 분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사를 끝낸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다시 왕릉 공사가 이어졌다. 불과 2년에 3개 왕릉의 공사가 있었다. 왕릉 조성에는 약 6000명의 인력이 동원된다. 전국에서 모인 일꾼들이 수개월간 땀과 피를 흘려서 만드는 대공사인 것이다.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후손들은 조선 왕릉의 자연과 역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창릉 금천교인 ‘비호교’는 왕릉 입구에 있는 다리이며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창릉 금천교인 ‘비호교’는 왕릉 입구에 있는 다리이며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예종, 뜻대로 할 수 없는 처지

예종은 세종 32년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살에 해명대군이 됐고 1457년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 나이로 죽자 세자가 됐다. 실록은 “예종이 총명·과단하며 공손하고 속이 깊으며 공부를 성실히 하며 덕을 쌓고 업을 이루므로 세조는 ‘세자가 못하는 게 없다’”고 했다. 효자인 그는 세조의 병환이 깊어지자 수라상과 약을 직접 챙기며 극진히 간호했다. 세조는 병이 위중해 1468년 9월 7일 수강궁으로 이어했고 이내 “내가 세자에게 전위하려 하니, 준비하라”고 했다. 정인지 등이 “병환이 나아가시는데 어찌 자리를 내놓으려 하십니까”하며 반대했고 이를 들은 세조는 노하여 “운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하다. 너희들이 내 뜻을 어기니,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하니 모두 임금 뜻에 따랐다. 날이 저물자 세자가 수강궁에서 제8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이날 세조는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이 됐다.

창릉 진입구의 ‘금천교’. 그러나 군사 지역이었던 관계로 군부대의 이름을 따서 ‘비호교’라 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창릉 진입구의 ‘금천교’. 그러나 군사 지역이었던 관계로 군부대의 이름을 따서 ‘비호교’라 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다음날 9월 8일 태상왕이 명해 소훈 한씨(안순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그날 밤 세조가 세상을 떴다. 예종이 즉위했지만 어머니 정희왕후와 형수 소혜왕후가 왕실을 이끌었고,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로들이 정국을 주도했다. 예종은 ‘민수사옥(閔粹史獄)’을 통해 자신이 힘없는 왕임을 느꼈다. 민수는 세조 때 춘추관 사관이었다. 세조가 죽자 사초(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초고) 제출을 해야 했다. 그는 실세에 대한 부정적 기록이 밝혀질까 두려워 제출한 사초를 빼내 고쳤다가 들키고 말았다. 예종은 민수를 내치고 강치성, 원숙강을 참형에 처했다. 예종은 사관들이 왕보다 훈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판위’는 배위라고도 한다. 제례를 위해 왕이 홍살문 앞에 내려 절을 하는 곳으로 4배를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판위’는 배위라고도 한다. 제례를 위해 왕이 홍살문 앞에 내려 절을 하는 곳으로 4배를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예종의 사람들, 배향공신과 영의정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원로 공신이나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크기 마련이다. 이를 못마땅해하던 세조는 종친 세력을 키웠다. 그 핵심 인물이 이준과 남이였다. 구성군 이준은 1441년 1월 20일 세종의 손자이자 임영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조의 후광과 출중한 능력으로 승승장구했다. 1466년 세조 때 등준시 무과 급제로 경재(卿宰, 임금을 돕고 관원을 지휘 감독하는 2품)의 직에 선발됐다. 이어 도총관(정2품 무관직)이 되더니 1467년 총사령관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다. 27세에 병조판서가 됐고 1468년 9월 예종이 즉위하자 28세에 최연소 영의정이 됐다. 예종과 이준은 태종의 손자이자 한백륜의 사위였다. 1469년 1월 아버지 임영대군이 죽자 물러났다. 그러나 1470(성종 1)년 성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노린다고 하여 정인지 등의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로 귀양을 갔다. 이 일로 최세호와 권맹희는 죽임을 당했다. 성종은 구성군과 가족을 살폈으며 구성군은 1479년 1월 39세에 사망했다.

남이는 태종의 4녀 정선공주의 아들이다. 훈신 권람의 사위인 그는 27세에 이준이 맡고 있던 병조 판서의 직에 올랐다. 구성군과 함께 활약이 컸으나 남이는 호탕한 기질을 숨기지 못했다. 한번은 세조에게 “구성군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그르게 여깁니다”라고 하자 세조가 못마땅 해 하며 “지친이고 큰 공이 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겠느냐”며 옥에 가두는 일이 있었다. 구공신들도 남이를 경계했다. 예종은 즉위 당일 남이를 병조판서(정2품)에서 겸사복장(종2품의 궁궐수비)으로 좌천시켰다. 그런 찰나에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남이는 잡혀갔고 가혹한 고문에 혐의를 인정했다. 그리고 공모자인 강순 등과 함께 거열형(사지를 당겨서 찢어 죽임)에 처해졌다. 힘없는 예종이었고 세조의 종친세력은 이렇게 제거됐다. 예종의 세력은 거의 없었다. 안성의 죽산 박씨 박원형이 있었는데 초대 영의정을 지냈고 사후 종묘배향공신이 됐다. 그는 1432년 사마시(하급관리)를 시작으로 6조의 판서와 좌·우찬성, 우·좌·영의정의 관직을 모두 지냈다. 세조를 돕고 중국 사은사로 다녀왔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다. 예종 1년 영의정이 됐으나 69세로 세상을 떴고 이후 한명회와 홍윤성이 영의정을 했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좌측은 혼령이 오르는 ‘신계’, 우측은 임금이 오르는 ‘어계’다. 방문객은 어계로 오른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좌측은 혼령이 오르는 ‘신계’, 우측은 임금이 오르는 ‘어계’다. 방문객은 어계로 오른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첫 부인 장순왕후 17세 요절

세조 이후 청주한씨 한확, 한명회, 한백륜의 위세가 대단했다. 한확은 덕종과 계양군(세종의 아들),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 한백륜은 예종과 이준(태종의 손자)을 사위로 뒀다. 예종은 1460(세조 6)년 11살에 한명회의 3녀(훗날 장순왕후, 1445년생)와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이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첫아들 인성 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떴다. 예종은 12살로 조선 왕으로서는 가장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됐다. 두 번째 부인은 한백륜의 딸로서 1462(세조 8)년 세자빈을 거쳐 1468년 왕비(안순왕후)로 책봉됐다. 그러나 이듬해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1469(예종 1)년 11월 28일, 실록은 “원상들은 예종의 승하를 정희대비에게 알렸다. 전날 대비에 문안드리고 업무도 보았기에 대비는 ‘주상이 아플 때도 아침마다 찾아왔거늘 병이 중하지 않아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찌 하겠느냐’”라고 했다. 그리하고는 그날 바로 자산군을 왕(9대 성종)으로 책봉하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예종의 첫 부인이자 한명회의 셋째 딸 장순왕후의 무덤인 ‘공릉’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삼릉(공릉, 순릉, 영릉)에 위치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예종의 첫 부인이자 한명회의 셋째 딸 장순왕후의 무덤인 ‘공릉’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삼릉(공릉, 순릉, 영릉)에 위치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21.

부인 안순왕후는 25세에 청상이 됐고 1471(성종 2)년에 인혜대비, 1497(연산군 3)년에 명의대비가 됐다. 왕후는 비교적 조용하고 유순해 주변과 조화롭게 잘 지냈는데 성품이 아버지 한백륜을 닮았다고 한다. 한백륜에 대해 실록은 “처음 내시별감(종9품)이었으나 딸이 동궁소훈이 되자 세조가 공조정랑(정5품)으로 올렸다. 또한 예종이 왕이 되자 청천군이 됐고, 성종 때는 우의정과 청천부원군이 됐다. 성품이 순수하고 삼가는 편이나 다른 기능은 없었다. 정승이자 외척으로써 번영을 두려워해 여러 번 사직했으며, 사는 집이 좁아 친구가 고쳐 지으라고 권해도 웃으며 ‘이 집은 조상에게 받았고, 비바람을 막을 만한데, 어찌 고치겠는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순왕후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조정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고 25년간 대비로 지내다 1498년 55세에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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