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먼 나라와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1촌이라도 얻으면 왕의 것이고, 1척이라도 얻으면 왕의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고 먼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진왕은 그의 계책을 채택했다. BC266년, 양후(穰侯)를 대신해 재상이 된 범수는 원교근공이라는 대전략을 집행했다. 제3단계에 해당하는 연횡시대에 진은 외교와 군사를 배합하지 못했고, 게다가 매우 큰 약점까지 있어서 전략적 목표를 합리적으로 선택하지 못했다. 외교에서 진은 다른 나라와 합작하는 과정에서 여러 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복잡한 행동의 결과 국력을 소비해 도둑에게서 식량을 훔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범수는 목표를 견지하는 원칙을 주장했다. 그는 적국을 멀고 가까운 두 종류로 대별했다. 먼 나라와는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는 외교와 군사적 행동이 배합되기 시작했다. 절반의 노력으로 두 배의 결과를 얻는 행동원칙이 완성된 셈이다.

왕응린(王應麟)은 곤학기문(困學紀聞)에서 이 전략의 성공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6국은 범수가 원교근공책을 제출하면서 진에게 망했다. 진은 한과 위를 점령해 천하의 중심을 차지했다. 원교로 20년 동안 초를 공격하지 않았고, 40년 동안 제를 공격하지도 않았다. 근공으로는 잇달아 한과 위를 점령했다. 나머지 네 나라는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진이 6국을 점령한 것을 잠식(蠶食)이라고 부른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서 먹는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범수를 등용한 BC268년에서 이사(李斯)를 등용한 BC237년까지 31년 동안 진은 33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한을 11회, 위를 10회, 조를 10회, 초를 2회 공격했지만, 연과 제는 공격하지 않았다. 원교근공 전략의 집행이 철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연과 제는 안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원교의 대상인 국가끼리의 전쟁이 발생했다. 연, 제, 조 사이의 전쟁이 발생하자, 진은 일거양득을 챙겼다. 그들 국가는 국력을 소모했고, 진은 그 기회에 근공을 수행했다.

진은 전략에서 다른 나라가 미치지 못할 최대의 장점을 지녔다. 지속성과 일관성이다. 상앙, 장의, 범수에서 이사까지 모두 사상과 행동이 목표를 향해 일관됐다. 당연히 그들은 다른 단계를 대표하므로 전략적 행동은 달랐지만, 사상의 일치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사(李斯)는 진의 통일을 완성한 최후의 객경(客卿)이었다. 그의 시대에 진은 이미 절대적 우세를 차지했다. 성공 여부가 아니라 가속화가 문제였을 뿐이다. 이사는 6국 내부의 부패에 주의했다. 그는 내외협공전략으로 적국의 붕궤를 가속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André Beaufre가 주장한 내부동작(interior manoeuvre)과 외부동작(exterior manoeuvre)의 원리이다. 이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몰래 모사에게 금과 옥을 줘 제후들에게 유세하게 한다. 그들이 재물을 좋아하면, 많은 것을 보내 교류하고, 받지 않으면 자객을 보내 암살한다. 군주와 신하를 이간질하고, 우수한 장수도 멀어지게 한다.”

위료(尉繚)의 말은 더 노골적이다.

“재물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력가에게 뇌물을 줘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30만금이면 모든 제후를 망하게 할 수 있다.”

위협, 유인, 매수, 이간, 암살 등 파렴치한 수단을 마다하지 않고 적을 약화시키면서 군사행동과 배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단의 사용은 이사가 처음이 아니다. 그가 더 적극적이었을 뿐이다. 권모술수가 전술로서 합법성을 얻은 것이다. 역사에는 진이 적어도 이러한 방법을 3차례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평전투 이전, 조군은 본래 노장 염파가 지휘했다. 진은 청년으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조사의 아들 조괄이 두렵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 심리적 공세에 넘어간 조왕은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로 대치했다. 염파는 초로 도망쳤다. 결국 장평의 비극이 초래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