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간사이공학전수학교 시절의 강윤(가운데), (출처: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천지일보 2023.04.05.
간사이공학전수학교 시절의 강윤(가운데), (출처: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천지일보 2023.04.05.

유학생활
강윤은 공주 만세시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석방되자 건축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영명학교 윌리엄스 교장의 권고와 추천으로 택하게 된 길이었다. 강윤은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琵琶湖)의 동쪽 연안에 있는 상업도시 오미하치만(近江八幡)에 도착하여 보리스 선교사와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보리스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밑바닥부터 실무를 배우고 저녁에는 두부나 떡을 팔아 학비를 벌었다. 그는 조선인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일본인 동료들보다 몇 배 더 노력했으며 매일 목욕하여 조선인도 항상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23년 강윤은 오사카의 관서공학전수학교(關西工學專修學校: 현 오사카공과대학)의 건축과를 다니면서 오사카에 있는 보리스 건축지사에서 현장 감리 등 실무를 익혔다. 보리스 건축사에는 유명한 건축가들이 참여했으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들이 보내준 청년들을 키워 돌아가서 봉사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을 형제라고 생각하여 1934년 회사명도 보리스 건축에서 오미형제사(近江兄弟社)로 고쳤다.

강윤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보리스의 민주적 사상과 기독교의 봉사정신도 배웠다. 그는 보리스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고된 수련기간을 거쳐 많은 일본인 동료들을 제치고 7년 만에 건축설계 책임자(Project Chief Architect)가 되었으며 보리스의 가장 신임하는 수제자가 되었다. 보리스는 강윤에게 조선의 건축 프로젝트를 맡겼다.

강윤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바쁘게 지내다 1928년 나이 서른에야 초대 장로교 목사 최학삼(崔鶴三)의 2남 6녀 중 다섯째 딸인 최정신(崔貞信, 애칭은 사랑)과 서울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일본 오미하치만시의 스승 보리스 옆집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1930년에 장남 인근(仁根)과 1932년에 차남 준근(俊根)이 태어났다. 1928년부터 강윤 부부는 일본에 살면서 조선인으로서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강(姜)의 일어 발음은 ‘교’인데 그는 꼭 ‘강’이라고 조선식으로 부르게 했고, 3.1 독립만세 사건 때 생긴 이마와 머리의 칼자국도 감추지 않았다. 부인 최정신은 항상 흰색 치마저고리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백의민족의 상징이며 특히 나라가 일본에 의해 죽음을 당하여 조선 여인으로서 입는 상복이었다. 그리고 목사의 딸로서 딴 신이나 우상에게 절하는 신사참배를 절대 하지 않았다. 보리스 건축의 일인 기독교인 동료들도 강윤 부부의 신앙생활을 존경하였다.” - 아들 강신근 글

보리스 건축은 조선에서 주문해 오는 많은 교회건물, 병원, 복지시설, 학교, 주택 등의 건축 설계를 강윤에게 맡겼으며 디자인과 구조는 본사에서 하고, 현장 도면은 종로2가에 있는 지사에서 작성하였다.

태화기독교사회관 사진과 도면(출처: 김정동, 한국 근대건축의 재조명) ⓒ천지일보 2023.04.05.
태화기독교사회관 사진과 도면(출처: 김정동, 한국 근대건축의 재조명) ⓒ천지일보 2023.04.05.

태화관 건축
서울 인사동 194번지 태화관은 독립선언의 현장이었다. 이완용이 소유했던 이곳을 감리교 여선교회가 인수하여 순화궁 옛 한옥 건물 그대로 여성복지관으로 사용했다. 1935년 강윤이 설계한 이화여전의 다섯 건물이 준공되자 4대 관장인 빌링스리(M. Billingsly) 선교사가 일본 오미형제사의 보리스에게 건축을 부탁했다. 보리스는 이 프로젝트를 강윤에게 맡겼다.

태화관은 대지가 약 8155㎡(2647평)나 되는 큰 집이었다. 1921년부터 1933년까지 요리집으로 쓰던 낡은 한옥들을 그냥 유아원, 고아원, 산모교육, 여성교육, 유희실, 예배실 등 여러 가지로 사용하다가 근대화 된 건물로 건축하고자 했다. 강윤은 오미하치만의 본사와 종로2가에 있는 지사를 왕래하며 건물을 설계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했다.

1938년 5월 기공식을 했다. 시공은 이화여전 공사를 했던 복음건축창(福音建築廠)의 중국인 왕공온(王公溫)이 맡았다. 태화의 새 건물은 총건평 750평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3층 건물로서 서양식 슬레이트(slate) 지붕이 아니고 조선 기왓장을 써서 무게 있으면서도 그 근방에 있는 한옥이나 멀리 보이는 창덕궁, 광화문과 어울리게 했다. 외벽 윗면은 흰 회벽이고 아랫면은 화강암으로 마감했으며, 그 사이 경계는 인동문으로 둘렀다. 이층 예배실 위에 있는 지붕의 받침목(rafter, roof trust, joint)은 태극조각으로 했고, 나무의자마다 태극문양을 새기는 등 건물에 민족혼을 새겼다.

공사 중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인 시공업자 왕공온이 일꾼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철수하여 공사가 중단됐다. 결국 강윤이 직접 공사를 진행하여 1939년 11월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보리스가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태화사회관의 준공을 축하했다.

이화여대 본관 남측 입면도 (1932) ⓒ천지일보 2023.04.05.
이화여대 본관 남측 입면도 (1932) ⓒ천지일보 2023.04.05.

일제말기 외국 선교사 추방과 핍박
1940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조선총독부는 외국 선교사들의 출국을 강요했다. 출국을 거부하는 사람은 강제로 추방했다.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됐던 스승 윌리엄스 교장, 동료인 사워(Sauer), 빌링스리(M. Billingsly) 관장 등 여러 선교사들이 강윤에게 같이 미국에 가자고 했다. 전쟁이 나면 강윤이 친미분자로 핍박을 받아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강윤은 일본의 건축스승 보리스가 외롭게 일본에 남은 것처럼 그도 조선에 남아 조선의 건축물들을 지키고자 미국행을 거절했다. 조선총독부는 태화사회관을 몰수하여 종로경찰서로 썼다. 다행히 마당 건너 한쪽 구석에 있는 독립선언의 현장인 한옥은 빼앗기지 않았다. 그는 한옥을 선교사 사택과 함께 유치원으로 사용하며 보존했다.

그는 독립선언의 역사적 건물에 일꾼을 시켜 새 장판을 깔고 벽지도 바르고, 나무틀이나 문지방에 옻칠이나 니스칠을 하며 돌보았다. 종로경찰서는 태화사회관 지하실에 유치장을 만들었고, 이층 예배실 천장 받침목에 있는 태극 조각을 철거하라고 강요했다. 강윤은 그것들을 떼어내면 지붕이 내려앉는다며 거부하다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임박하자 총독부는 미국인 회사 보리스 건축이 조선에서 사업을 못하게 금지시켰다. 보리스는 강윤이 독자적으로 건축일을 맡아서 하게 했다. 그러나 미국인과 가까운 강윤이 사업하는 것을 일제 당국은 억압했다. 4년간의 태평양전쟁 기간 중 건축일이 거의 없었다. 단지 폭격에 파손된 건물 보수공사와 선교사들 살던 집들을 돌보아 주며 제한된 설계 일만 했다. 사무실도 종로2가 YMCA 건너편 성서회관에 세 들어 사용하던 보리스 건축지사 사무실을 자신의 이름으로 낸 대원공무소로 썼다.

간사이공학전수학교 시절의 강윤 (출처: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천지일보 2023.04.05.
간사이공학전수학교 시절의 강윤 (출처: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천지일보 2023.04.05.

해방 후
해방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강윤은 미 연합군 사령관 아놀드 장군 측근들의 추천으로 미군 공병대의 자문으로 임명되어 한국의 복구 재건을 돕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 종로2가에 사무실을 내고 건축설계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에서 대한건축학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선교부에서 부탁받은 건물들과 중앙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 등의 설계를 하였으며, 미8군에서 발주하는 공사에 자문을 하였다. 그러나 미군 공사에 입찰이나 직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직책상의 원칙대로 자문만 하였고, 공사입찰을 낙찰 때까지 절대로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건설업계는 그를 소외시켰다. 그 때문에 사업상 어려움이 많았다. 그에게 많은 유혹이 있었고, 그의 측근을 이용하여 그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활이 어려워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다.

그는 선교재단의 일에 집중하여 설계로 바빴지만 시공이 항상 문제됐기 때문에 ‘고려토건’이라는 건축토목시공회사를 설립했다. 1949년 말에 미국 선교재단에서 강윤의 공헌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바쁜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게 49년형 포드 승용차를 보내줬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회사 차나 트럭을 운전하게 했고, 자가용 포드차는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 차로 자녀들 등하교시켜 주는 일은 절대 없었으나, 노인이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면 차에 태워 주었다. 그러다 보니 관청에 가면 기업의 사장이 아니라 운전기사로 취급당할 때가 많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아무런 것도 챙기지 못하고 입은 옷에 가족들만 담아 싣고 승용차로 피난을 떠났다. 그들은 깡통으로 구걸하여 밥을 얻어먹고, 손목시계나 가락지를 팔아 휘발유를 사서 남쪽으로 피난했다. 하동에서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승용차를 빼앗겼다. 가족은 군대 트럭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승용차는 4개월 만에 찾아왔다.

1953년 환도하니 팔판동 집은 동네 인민회 본부로 사용됐고, 가구와 서재의 책들은 다 없어지고, 바닥에는 인민군 선전물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게다가 건축사무소는 폭격으로 흔적도 없었으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설계도면, 감리일지, 건축 서적, 기록 사진들이 다 없어졌다.

청계천 입구에 사무실을 내고 다시 건축일을 시작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들의 보수공사가 많았고, 방림방적의 공장 증축공사, 을지로3가 성누가병원 건축, 교회 건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 건축 등이 이때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동란 후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그런 관행에 타협하지 않는 강윤에게는 사업상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그는 민주적 의식에 철저했다. 그의 팔판동 집에 선교사나 김구선생, 김규식 박사 등이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오면 큰 타원 식탁에 부인과 아이들을 다 같이 앉아서 식사하게 했다. 그는 친하게 지냈던 윤보선, 장면, 김상돈 같은 인물이 고위 공직에 있으면 절대 찾아가지 않았으며 전화조차도 하지 않았다. 집안의 큰일이나 비싼 물건을 구입할 때는 온 가족이 다수결로 결정했다.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그는 한국 건축업계에서 점차 배제 당하다시피 하였고, 1941년에 설계하여 지은 팔판동 자택도 결국 사업부채로 인해 은행에 넘어갔다. 1967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한두 달 후 쇠약한 부인 최정신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입원하여 1967년 7월 31일 사망했다. 그도 건강이 악화되어 반신불수의 고통 속에서 8년간 더 살다가 1975년 1월 30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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