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양특례시 고봉산에는 고대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5세기 초 고구려 안장왕과 개백현(지금의 행주산성 추정)에 살았던 토호의 딸 한주와의 사랑이 어린 곳이다. 두 사람의 얘기는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해상잡록이라는 책을 인용한 ‘조선상고사’에 기록되고 있다.

안장왕과 미녀와의 사랑은 춘향전 얘기처럼 드라마틱하다. 이 기록의 원전은 삼국사기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으로 여기에는 간단하게 기록되고 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지리(地里)편에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에 대한 설명 중에 한씨 미녀와 안장왕 이야기가 짧게 언급되고 있다.

‘왕봉현은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인(漢人·氏) 미녀(美女)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방이므로 왕봉(王逢)이라 했다’ ‘달을성현은 한씨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 불렸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 기록은 12세기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고봉산에 내려오는 얘기를 채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설화를 뒷받침할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안장왕 조에 ‘재위 11년(529AD) 10월에 안장왕이 오곡원(五谷原)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적 2000여명을 죽였다(十一年 同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克之殺獲二千餘級)'고 했다. 즉 안장왕이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고 오곡원에서 백제군과 일대 조우 대승을 얻었다는 기록이다.

고봉산과 고구려 백제의 격전지 ‘오곡원’은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을까. 오곡원이 안장왕과 한주미녀의 역사적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의 일부 의견은 오곡원을 황해도 서흥 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조에 흥안(안장왕)이 혈구(穴口)를 장악하자 성왕이 연모에게 군사 3만명을 보내 이를 오곡원에서 저지하려했던 것으로 나온다. 혈구는 지금의 강화도와 접한 김포 문수산성(고구려 비사성)으로 비정된다.

오곡원의 ‘오’는 백제어로 ‘대(大)’라는 뜻이다. 크다는 것을 지칭한 것으로 일본에 남아있는 인명이나 지명에서 ‘大’가 ‘오’로 발음된다. 오사카(大阪), 일본 개국조로 불리는 응신천황을 ‘오진 덴노’라고 호칭하는 것도 ‘大人’이라는 뜻이다. 언어학자들은 ‘오’가 백제어로 후에 ‘大’로 변환됐다고 해석하고 있다.

고양시 ‘대곡’은 고봉산성과 가까우며 백제 개백현으로 추정되는 행주산성의 서쪽 들판이다. 연모가 이끄는 3만명 백제 군사들은 오곡(대곡)에 진을 치고 김포 문수산성을 떠난 고구려 안장왕의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 수륙양군은 장창과 갑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로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한 정예 강군이었던 것으로 상정된다.

한주미녀는 왜 고봉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린 것일까. 자신이 옥에서 나와 살아있다는 것을 알린 것으로 보인다. 단재 상고사에는 ‘안장왕이 보낸 고구려 결사대가 한주미녀를 구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장왕의 오곡전투는 태자시절 변복으로 백제에 잠입하고 돌아가 왕이 된 후 9년 뒤의 일이다. 10대의 두 사람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고봉산 성지 유적에서는 고구려 적색와편이 다수 조사됐다. 이는 두 사람의 얘기를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춘향전을 방불하는 안장왕과 한주미녀의 사랑은 우리역사의 숨은 러브스토리다. 고양시가 최근 고봉산에 대한 역사 찾기에 적극 나서 기쁜 마음으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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