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

‘디방통신’ ‘구셰신문’(1916년 11월 1일 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염규호씨와 그의 부인은 구세군을 심히 사랑하였고, 구세군영 설립을 바라 재정을 아끼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3.03.03.
‘디방통신’ ‘구셰신문’(1916년 11월 1일 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염규호씨와 그의 부인은 구세군을 심히 사랑하였고, 구세군영 설립을 바라 재정을 아끼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3.03.03.

[천지일보=박주환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이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권애라(權愛羅, 1897년~1973년, 애국장, 1990년)·신관빈(申寬彬, 1885년~미상, 애족장, 2011년)·심영식(沈永植, 1887년~1983년, 애족장, 1990년)·임명애(林明愛, 1886년~1938년, 애족장, 1990년) 선생을 2023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는 3월 한달간(1일~31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개성 북부교회,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한 권애라 사진 등을 전시한다.

권애라·신관빈·심영식·임명애는 1919년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이었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들이다. 이들은 학교와 종교를 매개로 형성된 기존의 관계망을 활용해 개성과 파주의 3.1운동을 이끌었다.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권애라 (1922년,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22년 러시아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권애라의 모습이다. 극동인민대표대회는 극동의 피압박민족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회의로 중국, 한국, 몽골 등에서 참석했다.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3.03.03.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권애라 (1922년,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22년 러시아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권애라의 모습이다. 극동인민대표대회는 극동의 피압박민족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회의로 중국, 한국, 몽골 등에서 참석했다.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3.03.03.

권애라는 1897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자랐으며, 호수돈여학교에서 초중등과정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유치사범과를 졸업했다. 1919년 당시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교사로 활동하던 권애라는 개성 북부교회 지하에 보관돼 있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나와 개성시내에 배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여성교육과 자주독립을 주제로 연설하며 ‘신여성’으로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2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신관빈은 1885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으며,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당시 호수돈여학교 기숙사 사감이자 북부교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일 권애라, 심영식과 함께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전하며 많은 이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튿날 교회에서 일경에 붙잡힌 신관빈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참혹한 옥중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1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개성 북부교회 전경(1920년대)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제공) 심영식과 신관빈이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던 개성 북부교회 모습이다. 개성 북부교회는 교육선교의 일환으로 호수돈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3.03.03.
개성 북부교회 전경(1920년대)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제공) 심영식과 신관빈이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던 개성 북부교회 모습이다. 개성 북부교회는 교육선교의 일환으로 호수돈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3.03.03.

심영식은 1887년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뒤 시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맹아학교, 호수돈여학교 등에서 공부했으며, 1919년에는 전도부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호수돈여학교 출신 여성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배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3월 초 개성 시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옥고를 치르던 중 일경에게 뺨을 맞아 한쪽 고막이 터져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출옥 후 1920년에는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또다시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임명애는 1886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구세군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던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와 함께 독실한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0일 임명애는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파주의 첫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3월 26일에는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이후 임명애는 만삭의 몸으로 여옥사 8호실에 수감되었다가 출산을 위해 잠시 출소한 후 갓난아이와 함께 재수감되었다. 이때 여옥사 8호실 동지들이 그들을 보살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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