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북한의 연좌제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과거 북한의 연좌제는 주로 조상을 잘못 만나 일생을 망치게 하더니 이젠 이른바 현행범의 부모까지 더불어 처벌하는 극악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북한 당국이 한국 영화를 보다가 적발된 청소년은 물론 그 부모도 처벌하겠다고 선포했다고 22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이 현지 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RFA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 영화 등을 보다 두 번째 적발될 경우에 부모를 처벌했지만, 이제는 초범일 경우에도 부모를 처벌한다는 것이다.

평안남도의 한 주민 소식통은 “20일 덕천시에서는 청소년들이 남조선 영화를 보거나 남조선 말투를 따라 하다 걸리면 해당 자녀의 부모에게도 처벌을 준다는 내용의 인민반회의가 있었다”면서 “아직도 청소년들 속에서 반동사상문화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현상을 척결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취해진 것”이라고 RFA에 전했다. 그러나 북한의 한국문화 동경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소식통은 “회의진행자는 자녀 교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므로 부모들이 순간순간 자녀의 교양자가 되지 못하면 자녀들이 자본주의 날라리 춤이나 추고 노래를 부르며 반사회주의적 행위자가 된다며 부모의 책임을 역설했다”고 말했다.

또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 영화를 보다 적발된 청소년은 초범일 경우에도 노동교화소 5년형, 그 부모일 경우 노동단련대에 6개월 이상 수감된다. 자본주의 춤이나 노래, 한국식 말투가 적발되면 자식이나 부모 모두 노동단련대 1~3개월 형에 처한다.

이뿐만 아니다. 평안북도의 한 소식통도 “용천군에서도 자녀의 교양에서 부모의 역할과 책임을 높이라는 인민반회의가 진행됐다”면서 “이제부터 반동사상문화를 따라 하다 적발된 청소년의 부모에게도 연대적 처벌이 따를 것임을 선포했다”고 RFA에 전했다. 반동사상문화에는 영어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거나 10대 학생들이 모여 통기타를 치면서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추는 현상, 여학생들이 화장하는 행위, 귀걸이와 목걸이를 하는 현상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소식통은 당국이 장마당 장사만 중요하게 여기고 자녀 교양을 소홀히 하다 보면 부모도 감옥에 가게 된다고 엄포를 놓자, 주민들이 나라에서 식량 배급을 주지 않으니 장사해서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지 않느냐며 반발했다고 했다. 한편 앞서 지난해 말에는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시청하다 적발된 10대 학생 3명이 시범 사례로 공개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고 RFA는 전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한은 이미 외부의 문화유입을 막기 위한 법률까지 제정한 상태다. 일명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2020년 12월에 북한 당국이 한류 등 모든 외부문화, 종교,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등 북한 당국의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 사실상 김정은의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뿌리 뽑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2021년 9월부터는 ‘청년교양보장법’과 함께 북한 사회를 옥죄고 있다. 고위 간부라도 이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국가정보원과 북한 내부를 취재하는 매체의 언급으로 그 내용의 일부가 파악돼 ‘한류 유포 최대 사형, 한국 영상물 시청 최대 징역 15년’이라는 끔찍한 수위, 세계적으로 유행한 오징어 게임 시청에 관한 연좌제를 동반한 잔혹한 처벌로 많은 한국 네티즌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국제적으로도 비난받고 있는 법이다.

이 법에 근거해 상상이 어려울 정도의 북한 역사상 최악의 잔인한 문화 탄압이 이뤄지고 있다. 이는 북한이 외부 문화 유입으로 체제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뜻을 의미한다. 이 법은 북한 주민이 원해서 제정된 게 아니라, 반대로 북한 주민이 원하는 것을 막고 있는 법이다.

기존 형법의 형량이 갈수록 세져가는 데도 한류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간부들도 말을 안 듣는 경우가 많았고, 주민들도 숨어가면서 이런 문화를 접해 청소년은 과반수가 생활습관까지 바꾼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의 고위층 자제들이 이 외부 사조에 더 몰두하는 일을 김정은 정권은 막기 어렵게 됐다. 즉 통치권자들이 솔선수범하면서 인민들의 의식변화를 단순한 연좌제로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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