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흥남철수선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7600톤짜리 배다. 이 배에 1만 4000명을 태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1950년 12월 23일 흥남을 떠나 2박 3일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인 25일 무사히 거제도에 닿았다. 이 배는 후일 미국 교통부로부터 ‘기적의 배’로 명명된다. 또 미 의회로부터는 용감한 업적의 선박에 수여되는 상인 ‘갤런트 어워드(Gallant Award)’가 수여된다. 그 선장 레너드 라루에게도 한·미 양국 정부로부터 훈·포장이 주어졌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후일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배에서 쌍안경으로 내려다보는 광경은 참으로 비참했다.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또는 끌고 항구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는 겁에 질린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딸려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하기를 ‘그렇게 작은 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실었음에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숱한 위험을 극복하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철이었던 그때에 나에겐 차가운 한국의 바다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있었다는 명확하고 확실한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는 기적을 체험했던 것 같다. 그런 그는 그때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흐른 1954년 미국 뉴저지 주의 뉴턴 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바오로수도원(St. Paul's Abbey)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monastic)가 된다. 거친 바다를 누비던 화물선 선장에서 세속과 인연이 먼 수도원 수사라니, 극적인 인생 항로의 대전환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흥남철수선에서 그가 하게 된 기적 체험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의 이름 ‘마리너스(Marinus)’는 ‘바다’라는 뜻의 ‘마린(marine)’을 연상케 하기 쉽지만 그것도 기실은 ‘성모 마리아(the Virgin Mary)’에서 따온 것이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흥남철수선을 탔을 때 35세였다. 막 선장이 되어 첫 임무로 그 배를 탔다. 그는 그때로부터 수사로서 50여년을 더 살고 2001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수도원은 유지와 운영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죽기 이틀 전 한국 왜관수도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었다 한다. 그의 한국과의 인연은 신비한 요소가 다분히 있다.    

흥남철수가 완료됐을 때 피아(彼我)의 대치 전선은 대체로 38도선 언저리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흥남철수는 유엔군 10만여명, 피난민 10만여명을 실어 날랐다. 가슴 아프게도 못 실어 나른 피난민 숫자도 실어 나른 숫자만큼은 됐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마오(毛)의 성화에 쫓기면서 12월 31일 한 번 더 유엔군을 남쪽으로 밀어내는 3차 대공세에 나선다. 이 공세가 바로 우리의 수도 서울을 두 번째로 적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던 1.4후퇴를 불렀다. 서울이 중공군의 손에 들어간 뒤 베이징에서는 그것을 경축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다. 그만큼 서울 점령은 그들에게 승전(勝戰)의 상징성이 컸으며 한국전에 참전한 그들 ‘인민’을 고무하는 좋은 정치적 재료로서 활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지웨이 장군이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옴으로써 그것이 비록 며칠은 안 되었을지라도 유엔군은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적에 밀리기보다 ‘공세’ ‘공격을 강조하는 그의 지휘방침 때문에 미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예전처럼 쉽게 밀리지 않았다. 병력과 장비의 손실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른바 1.4후퇴로 37도 선까지 중공군에게 내준 것도 한강 이북의 유엔군의 일부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한 리지웨이의 고심어린 작전상 후퇴였다. 비록 공세는 취하고 나섰지만 이즈음 중공군은 ‘바싹 마른 곡분(穀粉) 한 입에 눈(雪) 한 입’을 입에 털어 넣어 먹어야 할 만큼 허기와 싸우고 있었다. 본국에서 오는 식량 보급이라는 것은 그들 대군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그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은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다량의 군용식품(rations)들이었다. 배후의 소련과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이들의 충동질을 받는 마오는 유엔군을 더 남쪽으로 밀어붙일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펑더화이는 이런 굶주림 속에서의 전쟁은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더구나 제공권과 제해권을 다 빼앗긴 탓에 남쪽으로 길게 뻗친 육상 병참선만을 통해 탄약과 포탄, 식량을 본국에서 실어 오기란 쉽지가 않다. 그런데다가 보급품을 실어 올 차량이라고 해봤자 기껏 300여대뿐이며, 운행을 한다면 야간에 헤드라이트를 끈 채 겨우 가능한 정도였다. 전쟁은 펑더화이가 애초에 예견한 대로 보급에 승패가 달린 ‘보급전쟁(a battle of supply)’의 양상으로 흐르고 있었다. 펑이 선전포고도 없는 상태에서 대군(大軍)을 평안도 함경도 산악에 잠입시켜 덫을 치고 유엔군을 기다린 이유가 명약관화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장비와 무기가 월등하고 보급이 원활하며 제공권 제해권을 가진 미군을 이길 방법이 없다. 마오는 그의 군대가 남진을 계속하자 승리의 환상에 빠져들었다. 이에 반해 펑은 갈수록 불안이 더 커졌다. 아닌 게 아니라 리지웨이 휘하의 미군은 전열을 다시 정비한 후 일진일퇴의 소모전일지언정 중공군을 점차 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1951년 3월 15일에는 서울을 되찾는다. 그렇게 해서 전쟁은 결국 1953년 7월 27일 현 남북 대치 상태에서 휴전을 맞게 된다. 역시나 강토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쪽으로 찢어진 그대로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말한 ‘가장 추운 겨울’의 한국전쟁은 하복을 입은 채 성급하게 북진한 유엔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던 우리 양민들의 피해와 불행은 더욱 형용할 수가 없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인 흥남철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것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더구나 영화와 달리 치유가 안 된 상처들을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많이 안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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